“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 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텍스트 5장,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이 대목을 읽으면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전문>
김춘수 시인의 ‘꽃’을 검색하면 다양한 해설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해설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일컬었던 시적 언어가 존재를 가장 깊이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물론 텍스트의 주인공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물고기는 시적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 하나밖에 없는 물고기 되어준다면’ 데이비드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사도, 혹 자신이 신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에탄올이 뚝뚝 떨어지는 물고기는 현미경 위에서 찢기고 벌려지고 헤집어지며 ‘아르고말루스 요르다니(Agonmalus jordani)’가 된다. 그에게로 와서 하나밖에 없는 꽃이 되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가시로 덮인 검고 작은 용, ‘모서리가 없는 조던’은 유리병 속에 담겨 더 나은 인류를 위한 표본이 되어줄 것이다. 신이 부여해 준 ‘계층의 사다리’ 꼭대기에는 신을 닮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닮은 신, 즉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있어야 한다는 우월함이었을 것이다. 텍스트의 내용을 유추하면 그는 물고기들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생물에게 자신의 독특한 이름들을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도 그러니까.
그러나 별을 사랑했던 소년, 데이비드의 동심은 놀랍게 진화한다. 건물이 무너지는 지진 속에서도 사다리의 밑바닥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류애는 동산의 과실처럼 탐스럽게 익어간다. 애초에 아담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고작 여자가 먹어보라고 건네준 과일 한 개를 먹었을 뿐인데. 원죄가 운명이라면, 운명의 씨앗을 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변이는 통제를 벗어난 혼돈만 부추기고 다양성은 인류의 봄을 훼방하는 잡초에 불과할 뿐이다. 데이비드에게는 밟고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옆으로 세워 놓은 울타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작가, 룰루 밀러(Lulu Miller)는 과학 기자이며 무엇보다 여성이다. 무엇보다 여성인 점은 책을 읽게 되면 알게 된다.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 ‘너는 한 마리 개미’에 불과할 뿐이라고 알려주었던 아버지 밑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밀러는 몇 번의 자살 시도를 거친 후 혼돈의 유일한 탈출구는 빛나는 물건밖에 없음을 인지한다. 언젠가 빛나는 물건이 자신에게 멋진 헤드 샷을 날려줄 거라고 믿는 작가에게는 매력적인 총구를 막아 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명칭의 방패가 절실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표본 하여 수집하던 물고기들의 학명처럼 그녀도 진짜 이름을 발견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한 일대기도 흥미가 있지만 작가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찾기 위한 밀러의 고군분투가 울림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21년 12월에 초판이 발행되어 22년에 10월에 22판을 찍었으니, 독자들에게는 필독서였다. 내가 텍스트를 읽고 고마워하였던 건 독자들의 안목이다. 읽어야 할 책은 ‘언젠가’와 ‘반드시’로 나뉘는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다 충족시키는 것 같다. 내가 이용하는 온라인 서점에서는 작가들이 추천한 21세기 최고의 책으로도 선정되었다. 물론 리뷰는 호평과 혹평이 즐비하다. 텍스트가 가진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기대에 대한 충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일단은 네가 몰랐던 이야기이다. 권위 있는 과학자의 삶을 작가 삶과 연결하여 전기이자 수기를 쓴 발상은 파도 아래에는 또 다른 심연이 유영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의례 책을 만들면 내용과는 엇나가는 시시콜콜한 소리도 쓰기 마련인데, 마지막까지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허투루 쓴 글자는 없는 것 같다.
텍스트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울프의 「자기만의 방」, 영화 「쥐라기 공원」,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상상을 하며 읽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생각의 파편들, 눈이 즐거운 영화 한 편을 감상한 것 같은 흡족감이 있다. 그런데도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니.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지구가 어깨를 들썩였다.’
<6장, 박살, 11p>
나는 이 문장이 좋았다. 문장 하나에 책값은 차지하더라도 이 책에 공들인 내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만족이 있었다. 어쨌든 ‘지구가 어깨를 들썩였고, 우주 전체가 엉망진창 되었을 때’ 낙천성의 방패, 데이비드는 자신이 세운 물고기 왕국에서 박살 난 채로 나뒹굴던 물고기들이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뻐끔거리는 그네들의 마지막 숨통을 향해 바늘을 찔러 넣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텍스트의 내용과는 별개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우주적 대의에 부합한 사명감으로 천 쪼가리를 꿰맸을까. 그것이 정말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일까. 그렇다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지구가 어깨를 들썩일 때만 가능한가. 그야말로 혼돈이다. 모르겠다. ‘혼돈’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거대한 암흑 덩어리 같아서 ‘질서’라는 단어는 바다로 애처롭게 던져지는 돌멩이 같아서 말이다.
인류라는 종에 믿음을 가지고 진보하는 사람이 있고 어깨를 부딪치는 인류에게 심각한 회의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를 인정하고 그의 삶에 예의를 다하는 일은 '물고기 목에 이름 붙이기'가 아니다. 고래에게는 고래의 길이 있고, 상어에게는 상어의 길이 있고, 날치에게는 날치의 길이 있듯이, 포유류라 부르던, 양서류라 부르던, 어류라 부르던, 어차피 그들도 ‘인류’라는 범주를 규정하지 않고 살아간다.
생은 신의 유리병 속에 갇힌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길을 만들어내는 지느러미들의 물살인 것처럼, 그 물살의 파장이 당신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혼돈이 되어 줄 선택지처럼. 각자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정리한 정돈된 길들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