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인가? 기자들 앞에서 난데없이 바지춤의 허리띠를 풀며 멀쩡한 자신의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번쩍거렸던 가수가 있었다. 잊을만하면 은퇴한답시고 공연을 반복하더니 ‘번쩍이던 바지춤’ 사건 이후, 예외 없이 번쩍이는 사운드에 목청을 얹고 ‘테스 형, 세상이, 사랑이, 세월이 왜 이러냐’는 타령을 했다. 소크라테스라니? 가락보다는 가사를 유심히 들어는 봤다. 결과는 내가 아는 노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보다는 무슨 도끼를 나눠주는 산신령을 애타게 부르는 하소연 같았다. 뭣도 아니고, 멋도 아닌 노래, 그저 이슈몰이에 치중한 얇디얇은 철학적 배경. 천박한 번쩍임.
2500년 전에 당당하게 독배를 받아들인 늙은 철학자의 슬픈 최후를 안다면 허세로 가득한 한바탕 쇼에 소환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읽기는 했을까.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모른다는 태도, 즉,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인정하며 지혜를 규명하라는 델포이 신전의 아포리즘이다. 신전에서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칭호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실천하다가 죽는다. 아직도 국민은 계엄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 이 시국에 공연을 하면 그냥 번쩍이는 노래나 부를 일이지, 돌아가는 세상사에 말을 보탠답시고, 오른쪽 왼쪽을 들먹이더니 ‘왼쪽, 니들은 뭘 잘했냐’며 바지춤 허리띠 풀 듯이 또 나섰다. 사람들이 따지니까, 나이도 어린것들이 어른에게 대든다고 냅다 또 번쩍거리신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그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모른다. 아예 모른다. 무언가를 잘 모를 때는 그저 앞니로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어주며 벙 찐 표정이나 보여주면 박수나 받을 텐데, 그는 무지한 게 아니라 무식하다. 그리고 나는 무지하다.
텍스트 『모든 것은 빛난다』는 여전히 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반짝이는 울림을 주는 경종 같은 책이다. 책의 공동 저자, 휴버트 드레이퍼스 Hubert Dreyfus와 숀 도렌스 켈리 Sean Dorrnce Kelly는 은둔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해석하는 현대 철학의 선구자들이다. 텍스트 『모든 것은 빛난다』는 하이데거 철학을 바탕에 두고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책의 내용은 『일리아드』『오뒷세이아』 『신곡』 『모비 딕』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마주했던 ‘신성하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포착한다. 그 순간들을 그리스어로 ‘피시스 physis’ 저자들은 ‘반짝임’이라 명명한다. 그 ‘반짝임’에 반응하여 삶의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현재는 빛이 난다는 거다.
텍스트의 제목처럼 모든 순간, 어느 때에도 우리는 빛나고 있었다. 다만 인간은 시간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 dasein’를 망각하고 상실하였다. ‘세계 내 존재’ 즉, 세계 안에 존재 인간이 느껴야 할 ‘현존재’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가 현시대의 기조로 자리 잡았다. 무기력과 우울의 증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의무적으로 겪는 질환이다. 이 현대의 만성질환을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들은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現存在’가 되라고 한다. 거기에도 있었고 여기에도 있는 존재, 삶에 충실하여 인간의 세계를 조망하는 것,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참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좁은 숲길을 걸으며 신성함과 경이에 늘 감사해하던 하이데거를 따라간다.
텍스트의 속의 텍스트 『모비 딕』에는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에 관한 일화가 있다. 야만인 퀴퀘그는 매일 밤 벽난로에 앉아 나무로 만든 원숭이 ‘요조’에게 두 번 절하고 인형과 함께 건빵을 구워 먹는 의식을 치른다.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 달라’며 처음부터 당당하게 요구하는 관찰자 ‘이슈미얼’은 기독교도이지만 식인종 퀴퀘그의 이교도 의식에 동참하여 기꺼이 이교의 신을 받아들인다. 『모비 딕』을 쓴 멜빌은 자신의 분신 ‘이슈미얼’을 통해 세계의 모든 신과 다른 인종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각자 그들만의 가치로 여겨주며 아무리 성질이 더러운 작살잡이라도 그만의 독특한 가치를 발견한다.
『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들이 『모비 딕』을 주요 텍스트로 다룬 데는 이유가 있다. 갈고닦은 장인정신으로 작살을 다루고 키를 다루는 선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이슈미얼은 그들 각자 방식으로 살아온 순간마다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의미가 없었다면 망망한 백색 바다가 주는 공포와 무기력감에 질려 거친 사내들은 바다로 투신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해심이 많고 관대한 이슈미얼의 표현대로 라면 ‘세계의 대양에 흩어져 있던 모든 바다의 신들이 서로 화합하는 순간이여! 경이여! 신성함이여!’ 이렇게 기록하여도 멋지지 않았을까.
1980년 대학가요제 은상을 수상한 ‘연극이 끝난 후’라는 곡이 있다. 멜로디와 연주는 도시풍의 세련된 감성처럼 부드럽고 보컬은 낭랑한 미성이 남기는 여운이 짙어 45년 전의 노래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다. 가사에서 1절은 연극이 끝난 텅 빈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심정, 2절은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이 서로 교차된다. 몸짓이 사라진 공허한 무언극 한 편을 다시 보는 것 같다. 피시스 physis와 니힐리티 nihility, 환호와 정적, 찬사와 고독, 반짝임 뒤에 오는 허무는 듣는 이를 페이소스에 취하게 한다. 아마도 저자들이 영어로 번역된 이 노래를 들었다면 텍스트의 첫 장에 분명 다뤘을 것이다. 모름지기 영감을 주는 노래라면 이래야 되지 않겠나. 난데없이 소크라테스에게 세상타령이라니, 정말 묻고 싶다. 이슈몰이로 성공한 당신의 아랫도리는 안녕하신가.
책을 읽다 보면 실존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떠 올 릴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 철학은 존재라는 형이상학에 집착하면 미노스의 미궁에서 헤매게 된다. 실존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대적하는 상황과 반드시 괴물을 때려잡겠다는 믿음이었다. 실존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마음가짐이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를 아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외면과 행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이다. 살아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면 실존주의 철학을 모르더라도 실존하게 된다. 다만 우리에게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의미가 필요하다는 것, 호수에서 반짝이는 윤슬처럼 여전히 세상은 빛나는 것들로 넘쳐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요즘 처지에 맞게 백수의 신을 숭앙한다. 그 처지에 부응하여 한동안 멀리했던 바둑을 둔다. 그러나 바둑의 신은 내가 고까우신가. 내가 놓는 신의 한 수는 패배의 한 수가 되어 판을 벌일 때마다 연전연패다. 품질이 떨어지는 지능이라고 부들부들 대지만, 어떡해야 하나. 언젠가는 ‘연전연패의 비결’ ‘당신도 하수가 될 수 있다’ ‘이따위 바둑’ 같은 글을 써서 바둑의 신에게 불굴의 한 수를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이기고 싶다. 진심이다. 나에게는 백수의 신이 계시하는 존재의 한 수가 필요하다.
머리에 샴푸를 하는데 얼마 전 현관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딸랑인다. 주말마다 성실하게 성경책을 챙겨 교회에 예배를 드리고 온 아내다. 오래전, 내 믿음을 온전히 바쳤던 여호와를 아내는 여전히 신앙한다. 덕분에 나 같은 인간하고 살아 주는 거 같아 여간 다행이 아니다. 한때는 풍성했던 머리카락도 샴푸 때마다 양이 점점 늘어난다. 소중했던 DNA를 물로 씻어내며 사태를 정리한다. 언젠가 이 머리도 반짝이겠지. 모든 것은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