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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Jul 01. 2023

이해받고 싶은 마음  

나의 갱년기에게

  남편과 말을 안 한 지 보름째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식탁 위에 밥을 차려놓으면 남편은 먹으란 소리를 하지 않아도 눈치껏 식탁에 앉는다. 25년이 다 되어가는 결혼생활은 말을 안 해도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행동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생활은 읽을 수 있으면서 서로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나 보다. 매일,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가족이라면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혼자 내뱉는 말까지 알아서 이해해 주리라는 서로의 욕심이 결국 큰 다툼으로 이어졌다.


  얼마 전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마스크를 안 가져왔다고 하니 남편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거였다. 요즘 들어 남편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아 안 그래도 내 기분이 많이 상해있었다. 시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신 데다가 몸 아픈 형제들이 있어 남편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란 걸 고려하더라도 느닷없이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를 때면 내 마음도 평정심을 잃고 만다. 남편에게 나이 들어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면 나중에 밥도 못 얻어먹는 거 알지? 라며 농이 섞인 말로 얘기를 한 적이 이미 서너 번이었다.


  “차에 마스크 없어? 없으면 집에 가서 가져와도 되잖아.”

  나는 남편의 행동에 많이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별일 아닌 일로 왜 큰소리부터 내냐고 나도 같이 소리치고 싶었지만 함께 길을 나설 때는 싸우지 않는다는 둘만의 규칙 같은 게 있던 터라 일단은 그냥 참았다. 남편 차 앞의 수납함을 뒤져 마스크를 찾아내자 둘 사이에 다시 평온함이 이어졌다. 마트에 들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반찬이며 생필품 몇 가지를 샀다.


  1차전은 무승부로 가볍게 끝났지만 2차전은 아들 녀석의 저녁 간식으로 햄버거를 사려고 롯데리아 앞에 차를 세웠을 때부터 시작됐다.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나만 가게로 들어가 햄버거를 사 오기로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마침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매번 사가는 불고기버거 세트를 포장해서 서둘러 남편 차에 올라탔는데 이미 남편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 세상의 모든 짜증과 불쾌함이 덕지덕지 묻어난 그의 말이었다. 손님이 하나도 없던 매장 안에서 늘 주문하던 햄버거 세트를 사 들고 나온 게 전부다. 뭘 얼마나 기다렸다고 화를 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라, 오늘 한번 해보자는 거지? 누구 성질이 더 드러운가 끝을 보자는 거지, 지금!’


  나는 나대로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있었다. 이미 마스크 문제로 한번 참았던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이 많아진 남편 때문에 힘들었는데 결국 내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이다. 햄버거를 들고 남편의 차에 다시 올라탄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몸과 마음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겨우 버티고 있는데 남편은 심란한 마음에 불을 활활 지피고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도대체 내가 요즘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나 한 건지.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이런저런 약 처방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눈치도 못 채는지. 내가 분명 갱년기 증상을 겪고 있다고 몇 번 얘기했는데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었다. 예전 같으면 남편도 지금 여러모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나한테라도 신경질을 부리는 거겠지,라며 이해하련만 지금은 내가 왜 이런 걸 참으며 살아야 되나, 신세한탄이 절로 나왔다.


  요즘은 마음이 쑥대밭이 돼버리면 다시 기름지게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좋지 않은 파장이 몸으로까지 번져 맥을 못 추는 일이 다반사라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철저히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몸과 마음도 늘 타던 리듬에 맞춰 일상생활을 해 나가야 추진력이 생긴다. 무너진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예전보다 너무 힘들고, 다시 탄력을 받기까지 견뎌야 하는 시간도 너무 곤혹스럽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오랜만에 집에 온 딸아이에게 얘기했더니 딸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빠 편을 들었다. 결국 나는 딸과도 큰 소리를 내게 되었다. 남편과의 싸움이 딸아이에게로 옮겨간 셈이었다. 안 그래도 남편 때문에 몸도 마음도 그로기상태인데 오랜만에 만난 딸까지 합세를 해 나는 완전히 녹다운되고 말았다. 나는 식구들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갱년기라고, 그래서 힘들다고. 본인들이 겪어보지 않은 일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걸까. 식구들은 갱년기라는 시기를 겪고 있는 내가 오히려 별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우리 집 애들은 내가 강자고 남편은 늘 약자로 생각했다. 엄마는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아빠는 조용하고 늘 지는 사람이라 여겼다. 아이들에게 늙어가는 엄마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건 역시나 내 욕심이었나 보다. 나이 든 남편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하물며 나이 어린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건 역시 무리였다.


  나도 내 성격이 별나다는 건 인정을 한다. 성격으로 치자면 나보다는 남편 성격이 무던하고 온순한 편이라는 것도 잘 안다. 아이들이 남편 성격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것도 나보다는 남편이 인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성숙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래도 갱년기를 앓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내 성격 중에도 얼마든지 멋진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해 주는 가족이 그립다. 비록 많이 비틀거렸지만 열정적으로 살아온 내 인생에 무조건 큰 박수 쳐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도 남몰래 더 크게 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 말이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냥 모든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유명한 광고 속의 이 노래는 순전히 거짓이다. 속마음은 공기를 타고 말이라는 매개를 통해야만 상대방이 정확히 안다. 갱년기, 아무리 말을 해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그 무엇인가 보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내 곁에 머물 갱년기에게 앞으로 잘해보자는 악수를 청한다. 다른 이들에게 이해받기보다 스스로가 갱년기와 친해지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지혜로운 일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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