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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Nov 29. 2024

존재 자체로 빛나는 기차역

『능주역』

  오늘은 능주역에서 명봉역까지 무궁화호를 타기로 한다. 아마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간단한 요기도 할 겸 차를 가지고 능주역 주변을 둘러본다. 마침 가까운 곳에 농협이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농협인데 농협 바로 옆에 이곳 능주에만 있는 장소가 자리 잡고 있다. ‘능성마루’라고 불리는 곳, 능주의 옛 지명인 ‘능성’과 대청을 뜻하는 ‘마루’를 더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민들을 위한 일종의 무료 휴게소다. 농협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능성마루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나는 농협 안에 있는 제과점에서 커피 한 잔과 작은 통밀 식빵을 사서 능성마루로 간다. 화분에 예쁘게 담긴 꽃들이 나를 맞이한다. 여느 카페처럼 화분 몇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방이 전부 꽃이다. 천천히 걸으며 식물의 생김새와 이름을 살핀다. 소담스러운 흰 꽃이 만발한 제라늄, 주홍빛의 싱그러운 베고니아, 보라색의 꽃도라지, 잎이 꽃처럼 아름다운 달개비, 거기에 꽃잎으로 만든 작은 액자며 아기자기한 실내장식 소품도 많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회색 양철통에 담긴 여러 가지 미니국화다. 작은 화분 여러 개를 양철통에 담아놓았는데 마치 여러 개가 한 세트인 듯 조화를 이룬다. 꽃도 꽃이지만 나지막하면서 둘레가 긴 양철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 주는 안정감과 화분 여러 개를 품고 있는 넉넉함에 푹 빠져든다. 꽃의 색상이 다양하여 자칫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들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는 양철통이 모두를 하나로 모아주는 느낌이다. 능성마루는 내가 가본 카페 중에 실내에 가장 많은 식물이 있는 곳이다. 풍성한 화초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


  모든 화분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판매용 화분으로 공간을 장식한다는 아이디어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고객들은 잠시나마 꽃밭 같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꽃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제공자로서도 별도의 실내장식 비용이 들지 않으니 크게 손해나는 일은 아닐 듯하다. 작은 식물 하나가 사람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나로서는 능성마루와 같은 무료 공간이 더욱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능주역의 건축 연도는 1956년 12월 31일, 열차 운행 횟수는 평일에는 무궁화호 8회, 주말에는 관광열차인 S-Train까지 포함하여 10회다. 2021년부터 평일 주간에만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역에 대한 사진 지식이 없더라도 역사 벽면에 붙어있는 열차시간표와 게시물을 보면 간단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다.

열차 타는곳에서 바라본 능주역사

  열차 타는 곳에서 바라본 능주역사의 모습이 밖에서 바라보던 때보다 훨씬 예쁘다. 어느 역이나 그런 듯하다. 예전에 개찰구로 쓰였던 곳의 처마 때문인지, 철길을 볼 수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역 광장 쪽에서 보는 것보다 열차가 다니는 승강장에서 바라보는 역사의 모습이 더욱 멋스럽다.


  승강장에 홀로 서 있는 역명표지가 눈길을 끈다. 하단에 유명 연예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니 TV 프로그램 촬영을 하면서 알록달록 색칠을 한 모양이다. 일반인들은 색칠된 표지가 예쁘다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능주역은 역사 자체를 비롯하여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역명표지도 그중 하나다. 능주역에 있는 표지가 오래전에 세워진 건지,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쪽 면을 알록달록하게 칠해버림으로써 능주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빛과 향을 약간은 상실한 느낌이 든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노란색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사방을 자세히 살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자니 벌써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열차 도착시간 2분 전이다. 뭔가 좀 미심쩍다 싶으면서도 ‘이 지역은 승객이 없어 열차가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들어오는가 보구나’라고 생각하며 기차에 오른다. 내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 순간 내 귀를 때리는 안내방송, “우리 열차는 마주 오는 열차를 비켜 가기 위하여……. 안전한 객실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당황하여 가슴이 쿵쾅거린다. 열차 교행이다. 교행이란 단선 구간에서 열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열차를 기다렸다가 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지금 능주역에서 내가 탄 열차 외에 한 대의 열차가 더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여객열차가 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 행선지 방향 확인도 하지 않고 열차에 오른 내 실수다. 후다닥 내려 전무에게 확인을 한다. 역시나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것이다. 예전에도 기차를 잘못 탄 적이 있었는데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다니. 역에 근무하는 직원으로서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다.


  다행히 열차에서 내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열차를 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서둘러 내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제야 내 마음도 제자리를 찾은 듯 안도감이 몰려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자연의 풍광에 빠져있자니 어느새 명봉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일상으로부터 떠나온 자의 해방감에 온몸이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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