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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Nov 28. 2024

음악회를 열고 싶은 기차역

『남평역』

  숙소가 있는 광주역 근처에서 남평역으로 가는 길,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니 농촌 풍경이 길게 이어진다. 좁은 찻길 양옆으로 논과 밭, 비닐하우스, 낮은 산과 나무가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풍경과 닮은 듯하지만 처음 가는 길이 주는 낯섦과 설렘이 추가되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길을 30여 분 정도 온 것 같은데 큰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구석진 곳에 역이 있나, 혹시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땐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상책이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는 멘트가 나오기 전까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길을 간다. 끝까지 가보고 아니면 돌아오면 된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렇지만 삶의 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나 달성해야 할 어떤 목표가 생기면 많은 고민과 갈등을 안고 첫발을 내디디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무조건 직진하는 편이다. 그것이 흡족한 결과를 가져올지 그렇지 않을지는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보아야 미련 없이 돌아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은 무작정 따라가는 전략이 성공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내비게이션의 무미건조한 소리도 이 순간만큼은 빌리 홀리데이의 재즈처럼 매혹적으로 들린다. 남평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는다. 역사 옆에 화장실 건물이 보이는데 열차가 서지 않는 곳이라 문이 닫혀 있을 확률이 높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다가가 온 마음을 담아 문을 연다. ‘제발, 제발…….’ 간절함이 주술적 기능을 했는지 부드럽고 가볍게 열리는 화장실 문! 정말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순간이다!


  행복한 기분으로 남평역을 둘러본다. 남평역은 1930년에 건립되었으나 여수·순천 사건으로 소실되어 1956년에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광장도 넓고 건물 자체도 규모가 커서 전체적으로 시원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광장 쪽에서 바라본 역사는 연기자 김수현 씨가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걸친 듯 깔끔하고 수수하다. 반면 타는 곳 쪽에서 본 역사는 펜싱 장비를 갖추고 경기에 임하는 오상욱 선수를 보는 것처럼 짜임새가 있고 격식을 좀 더 갖춘 느낌을 준다. 차양 지붕도 특색 있고, 역무실의 건물을 돌출되게 만들어 작은 지붕이 하나 더 있는 것도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타는 곳에서 바라본 남평역

  이마를 창문에 붙이고 굳게 잠겨있는 안을 들여다본다. 넓은 맞이방에 예전에 사용했을 난로의 흔적과 의자가 보인다. 한때는 승차권을 판매했을 매표창구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 주변에는 레일이 깔려있고 건널목 모형도 남아있다. 레일바이크가 운행했었나 보다. 남평역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없는 것은 오직 사람뿐…….


  남평역 주변의 나무를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돌보고 있나 보다. 역사 주변의 많은 나무가 사람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고목도 잘 자라고 있고, 가지치기도 수시로 해준 듯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역 주변이 넓은 탓에 나무가 그만큼 많은데도 정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문득 이런 곳에서 음악회가 열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역사(驛舍)를 품고 있는 넓은 광장과 광장을 둘러싼 잘 손질된 나무들. 여기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만날 수 있다면, KBS 관현악단의 앙코르곡으로 브람스의 헝가리무곡을 들으며 남평역을 찾은 모든 이들이 행복해할 수 있다면.


  실제로 강원도 평창의 계촌리에서 열리는 ‘계촌 클래식 축제’에 3일 동안 2만여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계촌은 다른 산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마을이었지만 예술마을로 변신하여 많은 사람이 이 마을을 찾게 되었다. 올해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김선욱 등이 무대를 꾸며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나는 계촌 클래식 축제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남평역 클래식 축제’,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다. 물론 기업체의 후원은 필수가 아닐까?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남평역을 둘러보고 클래식 축제를 떠올린 오늘, 몇 년 동안 기다려온 임윤찬 군의 연주회가 있는 날이다. 광주 예술의 전당, 내가 가본 공연장 중에서 가장 계단이 많은 곳이다. 표를 수령하고 서둘러 저녁 먹을 곳을 찾았으나 주변의 분식점들이 너무 붐빈다. 저녁이 되어도 30도를 남는 날씨 때문에 힘든데 허기까지 몰려오니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30여 분을 헤맨 끝에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았다. 행여 공연 시간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서둘러 공연장으로 가는 길,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내 좌석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 뒷자리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문재인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대통령이 손을 흔들어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공연장은 박수 소리와 함께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임윤찬 군의 공연을 보러온 것이다.


  연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걸을 힘조차 없이 휘청거리는 연주자에게 나를 포함한 관중 모두는 아낌없는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임윤찬 군의 뜨거운 열정과 한없는 자유로움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숙소로 돌아오는 길, 경호원들과 함께 연주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의 자유롭지 못한 일상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혼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오늘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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