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광주역』
오랜만에 2박 3일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번에 둘러볼 역들도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이거나 기차가 다니더라도 운행 횟수가 적어 기차로 여행하기에는 다소 애로가 있는 역들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광주광역시까지 승용차를 가지고 가기로 한다. 폐역은 승용차를 이용하여 둘러보고,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경전선 기차를 타면 된다. 이번 여행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여행 기간 중에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독주회에 갈 계획이기 때문이다. 광주보다 가까운 서울과 대구에도 연주회 일정이 잡혀있었지만 표 구매에 실패하고 말았다. 광주 공연이라도 성공했으니 감사할 뿐이다. 마침 경전선에 가보고 싶은 역들이 많았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구나, 생각하고 아예 2박 3일의 일정을 잡았다.
평일이라 고속도로 상황이 양호한 편이다. 특히 대구에서 광주까지는 유독 한산해서 내 삶에 장애물이 하나도 없는듯한 쾌감을 느낀다. 야간근무를 마친 직후의 장거리 운전이라 부담감이 컸는데 이 정도의 통행량이면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휴게소를 거쳐 가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장거리 운전이라 1시간마다 쉬어간다. 배가 불러도 꼭 사 먹게 되는 떡볶이, 맛이 없어 보이는 떡볶이라도 일단은 사서 맛을 보고야 마는 나의 떡볶이 사랑은 오늘도 계속된다. 맛없는 떡볶이라고 불평하는 일도 종종 있지만 휴게소 탐방은 언제나 즐겁다. 한때는 휴게소에서 음식을 사 먹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을 부러워하던 때도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즐기는 작은 행복을 간절히 바라던 때가 있었기에 휴게소 방문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늦게 숙소에 도착하여 짧은 휴식을 취한다. 저렴한 곳이라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예상외로 쾌적하다. 할인이 많은 평일인데다 6천 원 할인쿠폰까지 받아 그야말로 봉 잡았다는 기분이다. 조용하고, 주차까지 쉽다. 깨끗한 수건이며 비누, 샴푸 등이 잘 갖춰져 있고, 냉장고 안에는 생수는 물론, 음료수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 무더운 날이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있자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떠나오니 잡다한 생각을 담은 머릿속의 스위치를 완전히 꺼버릴 수 있어 홀가분하다.
가장 좋은 것은 2박 3일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 근무유형의 가장 큰 단점은 연속적인 휴일이 없다는 것이다. 주간, 야간, 비번, 휴일, 주간, 야간, 비번, 휴일, 이렇게 매번 똑같이 돌아가는 근무패턴이라 직장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연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직장인들의 달콤한 휴식 기간이라 할 수 있는 황금연휴라는 말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번 여행처럼 필요한 날에 연차를 사용하여 쉬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역이 바쁜 기간은 피하는 게 직원들 간의 암묵적인 예의다. 연차라도 써서 연속 휴일을 즐길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뒤, 남광주역으로 향한다. 기차역을 찾다 보니 남광주시장이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많이 크다. 채소 시장, 수산물 시장은 저녁 시간이라 문을 닫은 곳이 많다. 길거리의 국밥집과 횟집이 가장 활기차 보인다. 야외 테이블에서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성들이 보인다. 퇴근 후 가볍게 한잔하는가 보다. 문득 얼마 전에 내려온 회식 자제 공문이 생각난다. 회식 문화에 익숙한 중, 장년층과 2, 30대가 대다수인 신규자들의 문화가 현저히 다르다 보니 회식 과정에서 문제가 더러 생기는 듯하다.
가정보다 직장을 우선시하던 기존 세대는 회식도 직장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지만 신규자들은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술자리에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선배들과 마주 앉는 자리가 신입사원들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회식 자리를 크게 반기지 않는 편이지만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세대 간의 입장 차를 좁히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직장은 개인 생활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는 장소다. 과거에는 회식만으로 세대 간의 단합이 충분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
남광주시장은 남광주역과 출생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기차역이 생기자 사람들이 채소와 생선 등의 보따리를 들고 역 앞 공터로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전의 남광주역을 본 적은 없지만 시장의 규모로 보아 사람들로 북적였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에 대한 기대감은 막상 기차역이 있던 터를 찾아가자 작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남광주역 건물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역사(驛舍) 건물에 대한 사진이나 안내표지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이곳이 기차가 다니던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선로와 신호기는 볼 수 있었으나 막상 역 건물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길래 남광주역이 어디에 있었냐고 여쭤보니 공원으로 쓰고 있는 전체가 남광주역 자리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역이 있던 위치와 역의 모양 등 역 건물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이었는데 정작 내 눈으로 확인한 건 대략적인 타는 곳 규모였다.
남광주역은 경전선 완행열차를 타고 새벽 시장에 왔다가 장사를 마치고 저녁 기차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감싸 안는 공간이었다. 곽재구 시인의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 「사평역에서」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 시장 상인들이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전해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고 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사평역에서」 中에서
『사평역에서』, 곽재구 지음, 창비, 1983, p118.
시 속에 등장하는 아프고도 시린, 그러면서도 따스한 기차역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타는 곳 터에 남광주역의 건물을 실물과 비슷하게 지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복 차림으로 걷는 이들이 참 많다. 안내판은 이곳을 ‘폐선푸른길’이라 부른다 했다. ‘광주역과 남광주역 간에 철길을 폐쇄하고 시민의 힘으로 도시 푸른길을 광주의 상징적인 길로 만들어 푸른길이라 하였다.’ 역사(驛舍)가 없어 아쉬워하는 나에게 이곳은 시민들의 길, 광주의 푸른길이라고 도시가 나에게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숙소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김치를 산다. 편의점 앞에 놓여있는 탁자에 앉아 뜨거운 물에 라면이 조리되는 시간, 3분을 기다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심히 기다릴 수 있는 지금, 평온함이 나를 감싼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컵라면과 김치를 찍어 짧은 설명과 함께 가족 단톡방에 올린다. “이런 건 여행에서 아니면 못 먹음, 길거리 편의점에서” 문자를 확인한 딸아이가 엄지척 모양의 이모티콘으로 나를 응원한다. 행복함이 배가 된다.
남광주역과 남광주시장을 다녀온 뒤 얼마 되지 않아 TV 화면에서 익숙한 장소를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보니 바로 그곳이 남광주시장이었다. 새벽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일부러 새벽시장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활기를 띠고 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여행 중에 새벽시장을 가보는 건데 아쉬움이 컸다. 남광주역 때문에 생겼다는 남광주시장, 이제는 역은 사라지고 시장만 남아 남광주역의 지난날을 기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