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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i Feb 23. 2019

서른 다섯, 갑상선암 투병기 #4

수술 보류

"삼십 대 초반의 여자가 1cm 미만의 갑상선 유두암으로 사망하면 학계에 보고해야 합니다"


외과 의사선생님은 마치 내가 어떤 질문을 할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주르륵 빠졌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이 나왔다. 암이라는 얘기를 듣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너무 무서웠다고, 아직 못해본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고,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한참 동안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죽지 않는다니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기분이었다.


내과에서는 암이 아니어도 위치가 좋지 않아서 수술을 고려해야 하는 케이스라고 한 데다가 암이라는 것을 안 이상 하루라도 빨리 몸에서 암세포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외과 의사 선생님은 굳이 급하게 수술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워낙 천천히 자라는 암이고, 수술 이후의 환자의 삶의 질도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수술을 미루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갑상선암 환자를 추적 관찰한 결과 유두암이 폐, 뇌, 뼈 등으로 원격전이되는 경우는 0.1%도 되지 않고, 이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수치라고 설명하면서 전이 가능성도 낮다고 했다.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다른 병원도 다녀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 오히려 다른 병원의 진료를 권하기까지 했다.


그는 바빴고, 다음 환자가 밀려있었기에 나는 준비해 간 질문의 1/10도 물어보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와야 했다. 문득 지난 시간 의뢰인을 대했던 나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그들에게 친절한 변호사였을까?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퉁명스럽게 응대했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했을 때에도 회신하지 않았던  시간들.

그에게는 수십 명의 환자 중에 한 명이지만, 나에게는 인생 최대의 시련인 것처럼, 나에겐 맡겨진 수십 건의 사건 중 하나였지만 내 의뢰인에게는 전재산이 걸린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소송일 수 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검사 결과를 듣고 무너져 내렸던 마음은 당장 수술이 급하지 않다는 말에 어느 정도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하루하루 바쁘게, 그리고 의미 없이 살 수는 없었다. 지난 몇 주간의 시간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불안한 시간들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랑만 하기에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참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항상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 올진 모르지만 정말 나에게 죽음이라는 순간이 닥쳤을 때, 내가 누군가를 더 많이 미워하지 못한 것을, 더 많이 불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남겨진 시간 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평하기엔 나에게 시간이 부족했다.  사랑만 하기에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남겨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서른 세 해 만에 알게 되었다.


옛 직장 동료 중에 백혈병으로 투병을 하고 완쾌했던 변호사님이 "살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투병기간이 결코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그제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사 결과를 알기 전처럼 바쁘고 의미 없이 살았던 시간들로 10년, 20년, 30년을 더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이 과정 속에서 죽지 않는다면, 아니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하루하루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리고 내가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더 많이 사랑하고 살아간다면 나도 결코 이 모든 과정이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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