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째 날, 국립민속박물관
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여행기가 작성된 시기는 2019년입니다. 초고 상태로 저장해뒀던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2021년에 발간했습니다.
가을이 왔다. 요즘 들어 날이 계속 쨍하다. 이런 날씨는 일 년에 며칠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날씨를 최고로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국립민속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민속박물관은 경복궁터 내에 자리 잡고 있다. 경복궁은 여러 번 구경해봤지만 민속박물관은 처음인 것 같다.
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는 1960~70년대 근현대 거리의 모습을 재현해 둔 '추억의 거리'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오늘은 나의 추억은 아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따라 여행을 해보려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입구에서부터 벌써 쨍한 가을 하늘로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추억의 거리로 가는 길에는 가지각색의 석상들과 설치물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구름도 거의 없이 새파란 가을 하늘 덕분에 어디서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예술이다.
추억의 거리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태흥활자인쇄소'다. 내부에는 금속활자판이 빼곡하게 정열 되어 있고, 그 시절에 이 활자판으로 어떻게 인쇄가 이루어졌는지 인쇄기와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창신사장'이 나온다. 사장님 성함인가 싶지만 가만 보니 사진관이다. 그 시절에는 사진관을 '사장(寫場)'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도 역시 사진의 꽃은 결혼사진이었나 보다. 쇼윈도에 진열된 결혼사진과 증명사진이 눈길을 끈다. 창신동은 동대문 일대의 동네 이름이다.
조금 더 가니 '근대화 연쇄점'이 나온다. '소비자를 위한' 연쇄점이라는 문구가 재밌다. 연쇄점은 요즘 말로 하자면 체인점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편의점 정도 되는 점포이다.
안에 들어가니 각종 음료주와 과자, 국수, 통조림 등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빨간 돼지저금통도 눈에 띈다. 아이스크림 매대는 어째 지금과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요즘의 편의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연통이 길게 연결된 난로가 가게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쇄점 옆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목마가 알록달록한 천막 아래에 얌전히 앉아있다. 저 목마는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트럭을 타고 오곤 했다. 아저씨가 트럭에 목마를 실어 오면, 동네 아이들이 오다가다 엄마를 졸라 그 목마 위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전통주로 알려져 있는 '보해'에서 '매력'이라는 매실음료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여기 간판을 보고 처음 알았다. '매력'이라니 그 시절에도 마케터들은 작명 센스가 대단했구나 싶다.
연쇄점 옆으로는 이발소가 보인다. 슬그머니 들어가 보니 여기도 연쇄점과 마찬가지로 점포 한가운데 연통이 달린 난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발을 할 때 사용하는 물을 겨울이면 이 난로 위에서 데웠을 것이다. 면도를 하는 손님이 뒤로 누울 수 있게 개발된 이발소 의자는 지금 봐도 낯설지 않다. 다만, 타일로 둘러진 세면대에 올려진 세숫대야는 세월을 실감하게 한다.
이발소를 나와 조금 더 걸으니 고향식당이 나를 반긴다. 점심시간인지라, 국밥 한 그릇 후루룩 말아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국밥집 부엌에는 부뚜막에 가마솥이 2구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어 가마솥에서 쉴 새 없이 국밥을 퍼 날랐을 것이다. 또 저 항아리에서는 국물 뚝뚝 떨어지는 김장김치를 꺼내다가 잘라 날랐겠지 상상하고 있으려니 배가 고프다.
예나 지금이나 복덕방, 즉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은 꼭 대로변에 있을 필요가 없다. 전세와 월세를 알아볼 수 있다는 복덕방은 건물 뒤로 돌아 들어가면 있단다. 흥미가 동해서 골목길을 돌아가 보니 삼청 복덕방이 나온다. 토지, 가옥 매매 전문이라니 그 시절에도 역시 중개사는 전문성이 생명이었나 보다.
골목길을 다시 돌아 나왔다. 이번에는 '약속다방'이 눈에 띈다. 그 시절 다방 이름은 왜 이리 '약속'이 많았나 모른다. 지금도 사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많이 잡는다. 그때도 격식 차린 만남은 대체로 다방에서 이루어졌나 보다.
약속다방 안에는 정말 정겨운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브라운관 TV가 올려져 있다. 또 아마 털실을 이용한 스킬 자수 작품인 듯한 호랑이 그림이 입구에 떡하니 걸려있다.
이 모든 정겨운 풍경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DJ 뮤직박스였다. 언뜻 생각하기에 다방에 DJ 뮤직박스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 시절 정서이니 익숙지 않을 만도 하다. 얼마나 많은 청춘 남녀들이 작은 메모지에 가수와 곡명을 꼭꼭 눌러 적어 DJ에게 건넸을지, 또 자기들의 신청곡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올 때 다방 테이블 위로 슬며시 손을 잡으며 얼마나 연애에 열을 올렸을지 그려진다.
상상 속에서 DJ의 선곡에 빠져들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약속다방을 빠져나온다. 다방 맞은편에는 전파사가 있다. 라듸오, 레~코드와 T.V, 전축 등을 판매도 하고 수리도 하는 전파사다. 전파사만으로는 돈이 잘 안되는지, 도장도 파준다. 그 시절에도 원잡으로 시원찮은 사람들은 투잡을 뛰곤 했나 보다.
좀 더 걷다 보니 의상실이 눈에 띈다. 장미 의상실 쇼윈도우는 역시 유행을 선도하는 육각형으로 모던하게 짜여있고, 쇼윈도 안에는 모던한 마네킹이 모던걸 복장을 하고 서있다. '바바리' 코트와 넓은 체크무늬 자켓, 통이 넓은 브라운 팬츠 등이 눈에 띈다.
이런 번화한(?) 거리에 걸맞지 않게 골목 안 쪽에 북촌'국민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나도 '국민학교' 출신인지라 여기서 그리운 교실을 만나니 반갑다. 그 시절 학교답게 교탁은 연단 위에 자리를 했고, 흑판과 풍금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교실 정면 상단에 걸린 태극기와 교훈, 급훈,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시간표는 요즘 교실과 그다지 차이도 없는 것 같다.
북촌 국민학교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학생들의 참새방앗간, 고바우 만화방이 자리 잡고 있다. 만화방 한편에는 신간 만화들이 진열되어 있고, 간이의자와 낮은 테이블은 모여 앉아 백 원짜리 만화를 빌려 볼 아이들을 기다린다.
추억의 거리에는 점포들과 함께 눈길을 끄는 추억의 물건들도 있었다. 그 시절엔 아무 집에나 있던 게 아니라는 신식 '뽐뿌'와 겨울만 되면 아이들이 최고로 기다렸을 간식 '군고구마'를 파는 드럼통도 보였다.
또 집집마다 영화 포스터부터 제품 광고까지 벽보들이 가득 붙어있고, 이제는 그 의미마저 흐릿해진 '반공방첩'이라는 표어가 적힌 집도 눈에 띈다.
이렇게 한바탕 추억 여행을 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날씨는 여전히 너무나 화창하고 민속박물관의 소나무들은 푸르기만 하다. 이런 날씨에는 실내보다는 야외 전시회가 제격이라는 생각을 하며 박물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