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깊이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며 걱정했던 분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뒤로 미루곤 합니다.
미국은 동양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심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프로풋볼리그 최우수 선수가 된 하인스 워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운동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내 미식축구 인생은 어머니의 인생입니다. 어머니는 내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계신 사람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부모님 중 한 분만 계시는 사람이 느끼는 절실한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러시아의 민속 인형 중 하나인 ‘마트료시카’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형입니다. 이 인형 속에는 똑같은 모양의 작은 인형들이 다섯 개나 차례로 들어있어, 자식을 품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상징하지요.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의 주인공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위대한 어머니였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혁명의 길에 동참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고리키는 인간을 대문자로 표기하며,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 속에,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네 살 때까지 말도 하지 못했지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학습 능력이 떨어져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머리가 모자랍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니 학교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는 그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열등한 아이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적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며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그는 바이올린을 수준급으로 연주할 정도로 실력을 쌓았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지속적인 격려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자서 생각하고 추리하며 깊이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습니다.
독일에서는 학업이 뒤처진 아이를 "츠바이크 슈타인"이라 부릅니다. '아인'은 독일어로 하나를, '츠바이크'는 둘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처럼 늦더라도 언젠가 뛰어난 두 번째 아인슈타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 빠른 아이와 늦은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도 어린 시절에는 소문난 골칫덩이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를 매우 싫어했고 성적도 항상 꼴찌였지요.
그러나 단 한 사람, 어머니만은 에디슨을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에디슨이 학교에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직접 글을 가르치며 역사와 과학 책을 읽게 했습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쳤으며, 배움의 즐거움과 책 읽는 기쁨을 끊임없이 선물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에디슨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도록 지하실에 실험실까지 꾸며주었습니다. 친구들과 뛰놀 나이였지만, 에디슨은 지하실에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열두 살에 벌써 전신기를 조립하기 시작했지요. 어머니는 계속해서 도전하고, 끊임없이 학습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방식이 에디슨의 창의성을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도 사춘기 시절부터 부모님께 많은 걱정을 끼쳤습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그랬지요. 어느 날, 어머니께 화를 내고 집을 나갔습니다.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어머니가 남긴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야. 열여덟이 되면서부터 내 잔소리는 필요 없다고 했지. 하지만 스물한 살이 된 너를 보아라. 정말로 누구의 가르침이 더는 필요 없는 것 같니?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이 가득 찬 두툼한 저금통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제 네 통장은 거의 바닥이 났구나. 하지만 아직도 너에게 줄 감사와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다. 부디 올바른 길을 걸어주길 바란다. 저세상에서도 엄마는 언제나 너를 지켜줄 테니까.”
사랑을 담아, 엄마가
“아, 어머니…”
헤밍웨이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 이후, 그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실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때론 길을 잃은 자식도 되돌아오게 하는 마법과 같습니다. 오늘 그 마법으로 당신의 아이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세요.
전통적으로 하버드 대학의 총장은 좋은 가문 출신들이 맡아왔습니다. 하지만 닐 루빈스타인의 배경은 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계 러시아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식당 종업원이었지요. 더욱이, 루빈스타인 자신도 하버드 대학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미국 최고의 명문대 총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름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어머니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언제쯤 식당 일을 그만두실 생각이신가요?”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도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요.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유대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세상에 어머니를 만드셨다.’
어머니는 가장 가깝고 다정한 신의 이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참된 삶의 의미와 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 일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처럼 소박한 차림으로 아들을 맞이했습니다.
“조지, 너에게 주려고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단다.”
워싱턴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제 집안일은 직접 하지 마세요. 하인을 두셔서 편히 지내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서 수입을 늘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생각이다. 나에게 일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리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어머니 자리는 그만두겠다.”
아버지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때론 그 고마운 아버지가 초라해 보일 때 부끄러워하곤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링컨의 아버지는 신발 제조공이었습니다.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었던 상원 의원들은 이 때문에 링컨을 무시하곤 했습니다. 한 상원 의원이 링컨을 모욕하려고 말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데, 불편하니 수리해 달라.”
그 말을 듣고 링컨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신발 제조공으로서 완벽한 솜씨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분을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귀족들의 신발을 만드셨고,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발이 불편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기술을 옆에서 보고 배웠으니, 제가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만드신 신발을 최선을 다해 손봐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똑같은 모습일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자식을 향한 헌신과 사랑은 같습니다. 우리가 맑은 햇살을 보며 웃을 수 있는 건, 부모라는 큰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덕분입니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꾸며 주셨으니, 우리는 그들의 말년을 아름답게 꾸며드려야 합니다.”
브람스의 아버지는 호른을 연주하는 유랑 악사였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브람스가 유명해진 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직접 연주해 번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브람스는 여러 번 용돈을 드리려 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람스는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급한 일이 생기시면 책장에 꽂혀 있는 헨델의 <사울> 악보를 펼쳐 보세요. 아버지께 꼭 필요한 것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얼마 후, 아버지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고민 끝에 아들의 말을 떠올린 그는 책장에서 낡은 악보를 꺼내 펼쳐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들의 말대로 필요한 것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브람스가 책갈피마다 지폐를 정성스럽게 끼워 놓았던 것이지요.
아이들은 꿈이 많고, 작은 자극에도 큰 포부와 동기를 품게 됩니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물질로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뜻을 나누고, 함께 배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채워집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네루는 6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열세 살 된 딸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마저 감옥에 끌려간 상황에서, 홀로 남은 딸이 제대로 배우지 못할까 봐 마음이 아팠지요.
그러던 중, 편지를 읽던 네루는 깨달았습니다.
‘그래, 딸에게 편지를 써서 가르치자.’
그는 딸에게 세계 역사와 문화, 예술가와 철학자들에 대해 쉽게 풀어썼습니다. 딸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로부터 196편의 편지를 받으며, 세계 역사와 문화를 배워나갔습니다. 이 편지는 나중에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감옥의 창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네루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디라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상은 속임수에 불과하단다. 모든 행동에는 위험이 따르지만, 사람들은 결과를 두려워해 나서지 못하지. 그러나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가까이 가보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단다.”
1947년, 인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고 네루는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자라, 결국 인도의 수상이 되어 아버지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받아 실천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