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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석 Myste Lee Feb 03. 2016

서로의 가치를 확인하는 말 "도와줘"

괜찮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Relationship)

" 엄마!  내 양말 못 봤어?"

" 엄마! 어제 사놓은 거 어디다 뒀어?"

" 엄마! 저번에 내가 가지고 온 거 어디에 있어?"

" 엄마! 나 이게 잘 안돼 어떻게 해야 해?"


우리들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다. 작은 것을 하나 할 때에도 찾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쉽게 엄마를 찾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엄마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이 그 일들을 척척 해결하셨다. 난 죽어도 찾지 못하는 무언가를 순식간에 찾아내셨고,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하셨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그런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고 엄마를 통해 참 많은 일들을 했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또 엄마의 품을 떠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찾는 일들이  드물어졌다.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인터넷으로 해결했고,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내 스스로 무언인가를 이룩해내는 방법을 찾아갔다. 혼자 허둥대고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 나의 삶에 끼어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엄마에게 "엄마는 몰라도 된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때때로 그때마다 섭섭한 엄마의 얼굴들이 기억이 난다. 그때 엄마는 섭섭하다는 말 대신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많이 컸을까?” 나는 잘 몰랐다. 그 말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의미를, 그저 기특하게 바라봐 주시라. 이제 스스로 다 할 수 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엄마의 손을 필요하지 않은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나는 그렇게 하루도 쉴 새 없이 불러되었던 나의 원더우먼인 엄마의 자리를 조금씩 나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엄마를 밀어냈다. 그런데 정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이 어색하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다 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학교에서 하는 팀 프로젝트도 분명 과제는 팀이지만 분업을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한다. 그리고 그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일을 진행한다. 맡은 일에 대해서 다른 팀원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어색하지 않다. 경계를 나누는 일이  익숙해지면서, 함께 하는 일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소하게는 밥 먹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 그리고 그 이상까지. 함께하는 일들이 아주 조금씩  어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색함 속에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혹여 그것이 민폐는 아닌 것인가? 나의 책임에 대한 회피는 아닌 것인가? 수많은 것들을 따지면서 결국 혼자 마무리 짓는 일들이 많아졌다.


회사에서 내게 팀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맡겼다. 우리 팀의 팀원은 백유인 팀장님과 나 둘뿐 이었다. 팀의 대부분의 일들은 주로 내가 맡아서 진행했다.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보고를 준비해라! 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나부터 열까지 스토리라인을 구성해서 우리 팀이 하고 있는 일과, 팀의 성과, 팀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폰트에서부터 슬라이드 디자인 그리고 내용까지 꼼꼼히 준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 팀장님께 사전 보고를 드렸다. 전면 수정. 그것이 돌아온 답이었다. 내가 만든 보고서는 오로지 나 만을 위한 보고서지 누군가를 보여주고 설득시킬 수 있는 보고서가 아니라는 게 포인트였다. 그리고 그 후에 돌아오는 일침은 한 가지였다. 왜 물어보지 않았어? 왜 도와 달라고 말하지 않았어? 어찌 이렇게 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 해왔던 일 중 각 분야에 맞는 분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게 해요? 어떤 식으로 보여드리는 게 맞아요? 이게 맞는 건가요? 나의 판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판단을 하나로 모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많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다시 시작된 보고서 만들기는 한참이 지나서야 완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내가 만든 것과 비교를 하자면 질도 양도 너무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짜 마법은 그 다음부터 벌어졌다.


도와준 모든 사람이 내게 말했다.

“파이팅!”

“떨면  안 돼!”

“그 포인트는 잘 전달해야 돼!”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배들도 후배들도 내게 와서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중에는 평소에 나랑 친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서먹해진 사이도 있었다. 하지만 과정 중에 나를 도와주었던 선배들과 후배들은 마치 모두가 한마음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응원해 주었다. 보고가 끝나고 나를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잘했어?”

“잘했을 거야”

“고생했네”

무슨일이 일어난걸까? 내가 막히는 부분에서 이 모든 사람들을 귀찮게 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또 전화해야 했고, 또 물어봐야 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일에 치여 숨 막혀 헉헉거리고 있는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심지어 아주 귀찮은 듯이 대꾸를 했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란 조금도 있지 않았고 순전히 우리 팀과 나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무슨 마법이 일어난 건지 사람들은 나의 보고서 발표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주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다. “혹시 저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어요?"


나는 도움을 청한다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그건 곧 의지가  박약함처럼 느껴졌고 나의 일을 누군가에게 미루는 것처럼 보이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옆 사람은 분명 무엇인가로 바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부탁을 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피해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조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그 사람이 진심으로 잘 되기를 빌었다. 부탁하던 그 사람의 마음이 순간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상하게 오히려 도움을 청해 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그 사람이 가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내게 미약하게나마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아준 것이니까. 도와달란 말로,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나를 알아봐준 그 사람이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났다.

도와줘. 말은 의존적으로 느껴져 듣기 좋은 말은 아니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어떤면에서 노력도 해보지 않고 도와달라를 습관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좋은 모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악을 쓰고 싸웠을 때, 그리고 그 고난함 속에 지쳐 쓰러졌을 때, 우리는 가슴속 깊이 누군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섣불리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게 꼭 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거 같아서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그 한마디가 많은 것을 바꾸어냈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고, 또 결과적으로 보고도 잘 끝이 났다. 혼자 밤을 새워가며 일했던 그 순간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기껏해야 집에 앉아서 라면을 끓여먹는 일. 텔레비전을 보는 일, 사사로운 일들 뿐이다. 중요한 일들은 혼자 해내기엔 벅찬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우리가 정말 능력자라 척척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 그렇게 혼자서 척척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은 재수없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다가, 심지어 소소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일도, 라면을 끓여먹는 일도, 함께 할 때 더 즐겁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체온이 1도는 높아지는 기분이다. 엄마도 그랬을까?


엄마는 언제나 내게 엄마이고 싶어 했다. 문자 그대로의 엄마가 아니라, 힘들고 지치고 아플 때 찾는 엄마. 그리고 그렇게 엄마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때 엄마는 마치 10년 정도는 젊어진 것처럼 나를 안아주고 돌봐주고 사랑해주셨다. 예전에는 집에 가면 에이 불편하게 무슨 밥을 해 먹어요 나가서 먹어요 라고  이야기하며 외식을 했지만, 요즘은 조금 응석을 부린다. “아!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어야 집에 온 느낌이 나지!”, 엄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어온다. “뭐가 먹고 싶은데? 다해줄게” 나는 그 한마디의 말에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보살피고 사랑하시면서 또 한번 엄마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고 계셨고 내게도 동시에 엄마의 도움이 엄마의 사랑이 더 없이 달콤하게 다가온다.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필요 없을 때도 한 번씩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그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당신이 필요해. 당신은 내게 아주 의미 있는 사람이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오뚝이는, 내가 아무리 밀어도 혼자 씩씩하게 절대 넘어지지 않는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밀어주지 않으면 일어날 일도 없다. 오뚝이가 오뚝이가 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은, 나 지금 네가 필요해!라는 말이 된다. 서로의 가치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글_사진_Myst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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