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자런의 <랩 걸>을 읽고
2018년 상반기에 읽은 책이 몇 권 없지만(언제나 몇 권 없음) 그 중 최고를 뽑으라고 하면 바로 이 책 <랩 걸>이다. 그래서 읽은 것은 4월쯤인데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리뷰를 남기고 싶어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우선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트위터에서 팔로우를 하고 있는 과학 서적 전문 번역가이신 '김명남'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과학자'라고 했을 때 여성 과학자보다 남성 과학자를 먼저 떠올리는 나와, 나의 이런 사고 체계를 만든 사회 속에서 잘 써 내려간 여성 과학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소개 글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일단 표지가 너무 예쁘다. 나는 표지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는 독자이므로. 식물분류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인 신혜우님이 그린 '참나무겨우살이'와 Lab Girl 이라는 단어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이라는 문구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 책의 표지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표지와 종이가 주는 질감이 빳빳하게 코팅된 질감이 아니라 약간 스케치북 같기도 한 까끌까끌한 느낌이라 괜히 자연친화적인 것 같아서 이 책의 내용과도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400p 정도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분량의 다른 책들에 비해 가볍다는 것도 굉장한 장점)
일단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과학에 대한 얘기일 줄 알았는데 인생에 대한 얘기였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 책의 구성은 재미있는 것이 처음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씨앗에 대해, 줄기에 대해, 열매에 대해.. 이렇게 식물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작가의 인생을 엮어서 이야기하는 솜씨가 정말 제대로다. 예를 들면 씨앗에 대한 얘기를 한참 하다가 막 과학자로서의 삶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등 식물의 성장 과정과 자신의 인생을 잘 겹쳐서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은 따로 옮겨 놓았다가 수필을 가르칠 때 써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감출 수 없는 직업 의식)
작가 소개를 보니까 과학자로서 이룩한 업적도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글도 어쩜 이렇게 잘 쓸 수 있는 건지. 글 잘 쓰는 과학자들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존경하는데(ex 올리버색스) 호프 자런도 내게 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학업에 대해 지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의 치열한 삶의 고백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동경하고 좋아하면서 결국 그런 고백은 어느 정도를 이룬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뤘다'는 그 자체를 질투하기도 하면서 나는 영원히 동경만 할 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까지 많은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전혜린의 '산다는 것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와 같은 말을 메모장에 적어 놓고 읽고 또 읽었던 여고생의 감정, 잠시 잊어버렸던 그 감정을 다시 일깨워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 대신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79p)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해가 뜨길 기다렸다. 눈물 몇 방울이 볼을 적셨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도 아니어서 우는 것인지, 혹은 누구의 딸도 아닌 느낌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래프에 나타난 그 완벽한 선 하나가 너무도 아름답고, 내가 앞으로 영원히 그 선을 가리키며 나의 오팔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캠퍼스가 떠오르는 태양의 첫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다른 어느 누가 나처럼 숨이 멎을 듯한 이 아름다운 여명을 맞고 있을까 생각했다.'(106p)
이런 그녀의 고백 속에 다른 남자 과학자들은 절대 하지 않았을 고민과 절대 느끼지 않았을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을 보며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이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69년생의 호프 자런. 우리 엄마랑 나이가 비슷하다. 엄마는 어떤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까. 그리고 나, 나는 혹시 어떤 삶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성별을 떠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온 연구에서 성취를 했을 때 그 희열감, 정말 살아있다는 그 느낌. 그 느낌을 나도 어떤 분야에서든지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캠퍼스 전체는 밤새, 그리고 매일 환하게 불이 켜 있어서 어디까지가 캠퍼스인지 그 경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주말에는 적막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하기 중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대학 캠퍼스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소음으로 가득 찬 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금요일 자정 즈음이 되면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되고, 대학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반경 80킬로미터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우쭐해지면 짓궂은 짓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느껴질 정도만 일을 하곤 했다. 금요일 밤의 공기 속에는 과학의 정직하고 겸손한 심장이 고동을 치고, 과학적 발견과 장난기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무언가가 있다.'(145p)
이 부분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느꼈던 감정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에 띠지를 붙인 부분이다.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 학교를 바라보면서 나 말고도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외로움이 가시기도 했지만 평일의 학교는 너무나 분주하기 때문에 '내것'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늦은 밤이나 주말의 학교, 혹은 방학 때의 학교는 한산하고 적막해 온전히 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이 부분을 통해 떠오른, 적막한 학교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나,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도서관의 한 구석에서 연구하는 나(지금 생각하면 고작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지만)에 취해있던 20대 초반의 내 모습이 너무 그립기도 하면서 내 마음 속 학문에 대한 불꽃을 다시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외에도 진정한 '남사친' (!!) 학문적인 영혼의 동반자 '빌'의 존재는 신기하면서 함께 연구하는 소울메이트가 있다는 점에서 호프자런이 많이 부러워졌던 것 같다. 쿨한 성격 덕에 많이 의지가 되면서 동시에 내 연구를 해 나갈 때 서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니. 이 쯤에서 띠지를 붙여 놓은 빌의 한마디.
'어차피 학생들하고 친구가 될 수는 없어. 그러니 그런 희망은 지금 당장 버려. 너랑 나는 뼈가 닳도록 일을 하고, 똑같은 걸 계속 가르치고, 학생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겠지. 그래도 학생들은 늘 우리를 실망시킬 거야. 그게 우리 직업이야. 우리 둘 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거고.'
그리고 호프 자런이 아들을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 이야기에 눈이 많이 가는 것은 아마 나도 이제 곧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나이와 상황에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내 신체에 직접 일어나는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과정들, 그와 동반하는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한 여성의 커리어가 위협받을 수 있는 굉장한 현실적인 상황들. 그 속에서 극심한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마치 식물이 100만 년이 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 듯 자연의 위대한 실험 속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과학'에 바치는 그녀의 사랑 고백은 눈물이 조금 날 만큼 감동적이었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이 경외감을 느낄 무언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시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든 나도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398p)
나는 나 자신이 뼛속까지 문과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만약 내가 어릴 적에 이런 책을 보고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가정을 했을 정도로 마음을 두드린 그녀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아끼는 친구, 아니 제자, 나의 딸에게 너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일 평생을 바쳐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 사람보다 여자가 되고 싶다. 아직은 사실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랩걸이면 나는 스쿨걸일텐데. 국어교육 전공에 국어국문 복수전공까지 할 정도로 이 분야를 사랑했는데, 정확히 내가 사랑하는 것이 교육인지, 국어인지, 문학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러나 나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명확히 찾은 다음에 나를 억압하는 제약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깨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평생 내 마음 속 불꽃을 꺼트리지 않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