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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s Feb 22. 2023

친애하는 카푸스씨

퇴사일지 11

친애하는 카푸스씨 잘 지내고 계신지요.

답장이 많이 늦었습니다. 어느새 1년이나 흘렀으니 많이 늦었다는 말도 송구스럽습니다만 마음속엔 늘 당신에게 보내야 할 답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부디 알아주세요.


여러 안부를 전해 주셨는데 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여전히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부터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우 이 정도 쓰고 또 머리가 너무 아파 그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젠 더 미룰 수도 없고 저를 잊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참 여백이 남은 편지지를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소식을 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두통 얘기와 함께 그 당시의 소소한 일들을 전하고 건강하시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을 것 같네요. 지금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


다만 지난해엔 오직 하나의 대상에 온통 마음이 뺏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라도 사람이 나무가   없을 텐데 지난  년간 저는 나무가 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자연도 자연 나름대로의 투쟁이 있겠지만  과정은 소란스럽지 않고 비밀스러우며 다음 계절을 재촉하지 않고 오로지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나무에겐 봄이 오지 않을 일은 없다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그런 확신입니다.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고 그것에 푹 빠져있다 깨어나면 현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무가 되었다 깨어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두통에 시달리곤 합니다.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갑자기 눈을 뜬 것처럼 속절없는 기분이랄까요. 어느 책에서 보니 나무에게 200년이 꼭 지금의 제 나이와 같더군요. 이렇게 어느 속도에도 맞추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느라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만의 편지에 순 나무 얘기뿐이라 지루하실 수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제게 좋은 일은 모처럼 새로운 것에 이 정도의 애정과 관심이 생긴 일입니다.


새벽녘 아직 잠들어 있는 남편의 따뜻한 등에 조용히 이마를 묻고 있자니 오늘은 정말이지 두통이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앞으로도 나무가 될 수 없을 텐데 그렇다면 제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이들의 뿌리에 엉기고 기대어 살아가는 방법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뿌리가 연결된 나무 친구들은 뿌리를 통해 위험을 전하는 일에 민첩하고 꼭대기에선 빛을 나누는 데 경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덕분에 외따로 서 있는 나무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하더군요.


카푸스씨와 저도 이 첫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와 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모쪼록 좋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도록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이젠 낮은 곳에서 현기증 없이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두통은 현실에 살고 있지 않다는 신호인 것 같습니다.


다음엔 맑은 의식으로 편지를 쓰겠습니다. 나무 이야기만 하다가 마무리를 짓는 제가 드리기엔 우스운 부탁입니다만 어떤 소식이라도 전해 주세요.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지 새로 얻은 직장에 적응은 잘하셨는지, 거슬리지만 치워버리진 못하고 있는 거실의 의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카푸스씨의 그런 소소한 일상과 푸념들이 저에겐 큰 즐거움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곳에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해 주니까요.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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