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지 11
친애하는 카푸스씨 잘 지내고 계신지요.
답장이 많이 늦었습니다. 어느새 1년이나 흘렀으니 많이 늦었다는 말도 송구스럽습니다만 마음속엔 늘 당신에게 보내야 할 답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부디 알아주세요.
여러 안부를 전해 주셨는데 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여전히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부터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우 이 정도 쓰고 또 머리가 너무 아파 그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젠 더 미룰 수도 없고 저를 잊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참 여백이 남은 편지지를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소식을 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두통 얘기와 함께 그 당시의 소소한 일들을 전하고 건강하시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을 것 같네요. 지금도 달라진 건 없습니다.
다만 지난해엔 오직 하나의 대상에 온통 마음이 뺏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라도 사람이 나무가 될 순 없을 텐데 지난 일 년간 저는 나무가 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자연도 자연 나름대로의 투쟁이 있겠지만 그 과정은 소란스럽지 않고 비밀스러우며 다음 계절을 재촉하지 않고 오로지 제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나무에겐 봄이 오지 않을 일은 없다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건 그런 확신입니다.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고 그것에 푹 빠져있다 깨어나면 현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무가 되었다 깨어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두통에 시달리곤 합니다.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갑자기 눈을 뜬 것처럼 속절없는 기분이랄까요. 어느 책에서 보니 나무에게 200년이 꼭 지금의 제 나이와 같더군요. 이렇게 어느 속도에도 맞추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느라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만의 편지에 순 나무 얘기뿐이라 지루하실 수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제게 좋은 일은 모처럼 새로운 것에 이 정도의 애정과 관심이 생긴 일입니다.
새벽녘 아직 잠들어 있는 남편의 따뜻한 등에 조용히 이마를 묻고 있자니 오늘은 정말이지 두통이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앞으로도 나무가 될 수 없을 텐데 그렇다면 제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이들의 뿌리에 엉기고 기대어 살아가는 방법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뿌리가 연결된 나무 친구들은 뿌리를 통해 위험을 전하는 일에 민첩하고 꼭대기에선 빛을 나누는 데 경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덕분에 외따로 서 있는 나무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하더군요.
카푸스씨와 저도 이 첫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와 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모쪼록 좋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도록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이젠 낮은 곳에서 현기증 없이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두통은 현실에 살고 있지 않다는 신호인 것 같습니다.
다음엔 맑은 의식으로 편지를 쓰겠습니다. 나무 이야기만 하다가 마무리를 짓는 제가 드리기엔 우스운 부탁입니다만 어떤 소식이라도 전해 주세요.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지 새로 얻은 직장에 적응은 잘하셨는지, 거슬리지만 치워버리진 못하고 있는 거실의 의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카푸스씨의 그런 소소한 일상과 푸념들이 저에겐 큰 즐거움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곳에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해 주니까요.
당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