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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l 05. 2022

욱하는 오지라퍼가 살아남는 법

백치녀에게 배우다.

퇴근길 버스에 못 보던 새끼가 나타났다.     


‘근처에 도축장이 있나?’     


190에 육박하는 키와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 소도둑 같은 얼굴을 한 그놈이 타면 꼭 역겨운 피비린내가 났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를 한 놈은 늘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는 걸로 보아 직장인인 듯한데 툭하면 승객들과 싸우는 걸 보면 사람을 싫어하는 1인 사업자 같기도 했다. 사실, 주로 여자에게 욕하고 윽박질렀기 때문에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 화풀이로 보였다. 아무 여자에게 쌍욕을 하는 걸로 봐선 어딘가 모자란 놈 같기도 했고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도 이어폰을 꽂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눈과 귀를 버스 안과 일부러 단절해버린 것인데, 그럼에도 갑자기 소란한 공기가 느껴져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놈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져서 한 여자에게 악을 써대고 있었다. 이어폰을 빼고 놈의 욕을 해석해 보니 ‘니가 내 등을 밀었다. 그래서 내가 빡쳤다.’라는 아주 간단한 뜻이었다.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여자에게 성난 이빨로 으르렁 거리는 그 새끼를 보는 승객들은 그야말로 벙 찌다 못해 공포마저 느낀 것 같았다. 덩치에 쫄았는지 그 무지막지함에 질렸는지 어떤 제지도 없이 모두들 서로와 스마트폰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에? 제가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언제.. 아 네. 네. 죄송합니다.’     


여자는 놈의 욕 폭탄에 정신이 혼미한 건지 원래 맹한 건지 횡설수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표정이 매우 차분했다. 실제 미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옷차림도 어딘가 언발란스 한 느낌이었다. 며칠 되진 않았지만, 그간 놈에게 당한 서너 명의 여자들은 중년이고 젊은 여성이고 간에 저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다. 중년 아줌마들은 바락바락 대들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고 같이 욕을 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개 처음엔 자초지종을 따지다가 나중엔 '어머, 미친 새끼.' 하고 외면해 버렸다. 그리곤 스마트 폰에 시선을 꽂고 놈의 잔 욕을 개무시했다. 그러니 놈의 물리적 폭력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어서 버스는 그저 시끄러운 해프닝을 싣고 목적지로 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여자가 연신 꾸벅꾸벅 사과하고 놈은 더 기세 등등하니 여자는 아예 정신줄까지 놓은 듯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욱하는 내 성질이 점화됐다. 승객들이 점잖을 빼고 있는 사이 맥없이 당하고만 있는 여자가 너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이기 전에 뇌가 먼저 빠르게 회전했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이럴 땐 전술이 중요한 법!'   

‘말이 통할 놈이 아니니 내가 제지하는 순간 한 판 벌어질 것이 뻔하다. 승객들의 부수적 피해를 막기 위해 데리고 내릴까? 아니다. 아무래도 도와줄 사람들이 많은 버스 안이 낫겠다.’       

‘근데 아무도 안 도와주면 어쩌지?' 

'설마 존나 처 맞는데 못 본 척할라구.’ 


욱하는 나와 덩치에 쫀 내가 시작도 전에 설전부터 벌였다.

   

‘놈의 팔뚝이 내 종아리만 하니 일단 근접전은 안 된다. 잡히는 순간 넘어간다. 툭툭 잽으로 거리를 유지하며 약을 올리면 와락 달려들 테니 그때 카운터 펀치 빡! 끝!’     


살면서 본 남자들 중에 시끄러운 놈치고 싸움 잘하는 놈 못 봤고, 저렇게 덩치만 믿는 놈치고 빠른 놈에게 이기는 걸 못 본 경험에 의거해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한 일분 간 전술을 완벽하게 짜고 팔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외쳤다.      


“아저씨! 저 내려요.”      


정거장에서 승객을 내리고 막 출발하려던 버스가 멈칫했다. 버스 안 승객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리자 여자는 아까보다 더 담담한 얼굴과 도도한 걸음으로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홱 돌아 선 그녀.       


“야, 이 병신아.”      


그녀가 닫히는 문 사이로 쏜 욕이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와 승객들의 시선이 이번엔 놈의 얼굴로 쏠렸다. 놈은 황당이라고 해야 할지 당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엉뚱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였다. 여자는 그걸로 모자랐는지 버스 가까이 다가와 창문을 통해 이번엔 혀를 날렸다. 그건 분명 ‘메롱’이었다. 그렇게 그 여자는 혀를 길게 내밀고 애교인지 욕인지 모를 무언가를 쏜 후 총총 사라졌다. 이런 걸 백치미라고 하나?    


“풉!”

     

분명 슬픈 상황인데 웃음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큭큭 대는 소리가 새 나왔다. 


“저런 미친년이. 아우~”  

   

그녀가 사라진 창문에 대고 놈이 욕으로 대꾸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방심한 사이 기상천외한 일침을 당하고 만 벙찐 놈의 표정이 더 웃겼는데, 승객들은 대놓고 웃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내 전의는 사라졌다. 웃으며 싸울 순 없으니까. 

      

처음 그녀를 보고 어딘가 좀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은 게 근거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체 요즘 세상에 어떤 멀쩡한 여자가 생 양아치 같은 놈에게 무지막지한 욕을 먹고 아주 장난 같은 욕 한마디와 '메롱'을 쏘고 말겠는가. 그래서인지 상황종료 후, 그 여자가 좀 더 심한 욕을 하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그래야 그녀의 분이 조금이라도 더 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장면을 상상하니 순식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 여자가 분을 푸느라 악을 쓰고 욕을 했다면 오히려 굉장히 슬픈 장면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모욕을 줬는데 모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상대가 미친개라면 아예 모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나으니까. 최소한 그 여자는 내가 상상하는 수준의 모욕감은 못 느꼈을 거라 내 맘대로 상상하니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날 귀여운 그녀를 통해 나는 어떤 다짐을 했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미성숙이라고 하는 '욱하는 오지라퍼'인 내가 항상 하는 후회는 앞 뒤 재지 못하는 충동성이니, 그녀처럼 모진 상황에서도 기회를 기다리는 강한 인내심, 기회를 포착하고 잽싸게 이용하는 그 놀라운 기민함, 난 그런 걸 키워야겠다고. 그럼 적어도 과거처럼 아무 때나 욱했다가 후회막심할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적어도 객사할 일은 없지 않을까.    

아무튼, 이노무 욱하는 성질 때문에 내가 처 맞을 상황을 비켜간 것도 다 그녀의 재치 때문인 것 같아 고맙기까지 했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그 버스 안에는 또라이 새끼와 귀여운 백치, 그리고 그 둘을 지켜 본 신체 멀쩡한 비겁한 놈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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