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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Dec 02. 2022

오지라퍼들의 막장 시트콤

올해, 내 우울증은 질기도록 길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불쑥 불쑥 찾아오는 고독감 때문인지, 원인도 모른 채 처진 기분으로 만사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듯 보내고 있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우울증 약은 봉지 채 처박아두고 뭔가 집중할 일이나 활력소를 외부에서 찾고 있었다. 가끔씩 우울증을 앓지만 약의 효과를 본 적은 기억에 없었다. 차라리 어떤 내적 동기가 발동해 무엇에든 집중할 때, 또는 운동이나 짜릿한 외적 동기를 활력 삼아 나아지는 경험이 다였다.  

    

초가을비가 종일 추적거리던 날, 비가 잠시 멎은 틈에 아들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아들놈이라도 만나 이런저런 수다라도 떨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무언가 찾아다니며 먹는 걸 싫어하지만 일부러 멀리 맛 집이란 곳까지 찾아가서 과한 주문을 하고 술도 곁들였다. 그러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들놈 고민을 듣고 나니 더 우울해졌다. 오래 전에 살던 동네에 아들을 바래다주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네에 살 때도 가끔 들를 때마다 늘 손님이 없어서 기억한 곳인데 그날은 한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문을 열다말고 그 여자를 알아보고는 바로 돌아섰다. 


그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였다. 아니, 알지만 모르는 여자였다. 나와 같은 오지라퍼지만 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여자였다. 오래전, 나를 하찮은 동네 놈팽이로 취급했던 여자를 유리 너머로 보고 도망치듯 돌아섰다가 몇 걸음 못가 멈춰 섰다. 그간 문득문득 정체를 궁금해 했던 여자를 유리너머에 두고 내가 왜 피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그 여자가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고 허름한 술집에서 늦은 밤, 혼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여자일까’하는 궁금증에서 ‘왜’로 바뀌었다. 그때 그렇게 ‘천상천하 유아도도’ 했던 여자가 왜 나 같은 동네 아저씨나 드나드는 추레한 술집에서 혼술을 하고 있을까?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지금이 묵은 궁금증을 풀 기회였고 낯선(?)이성과의 술자리라는 ‘외부의 짜릿한 동기’를 얻을 기회였다. 감히 이 같은 무모한 기대를 한꺼번에 할 수 있었던 건, 그 여자가 내게 분명 술을 같이 먹자고 할 거란 무책임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지랖 방자한 사람치고 낯가리는 사람 별로 없고, 특히 저 여자는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여자라서 합석 정도는 애들 장난처럼 여길 거라는 추측이 근거라면 근거였다.      


일부러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여 사장의 호들갑스런 인사에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휴대폰을 열었다. 하루 종일 온 문자는 몇 개 안됐다. 평소 같으면 답장도 안했을 허접한 문자들에 일일이 답장을 했다. 내 딴엔 그 여자는 신경 안 쓴다는 고도의 가식이었다. 중년 나이쯤 되면 안다. 남자가 나잇살 먹고 여자 혼자 있다고 힐끔 거리는 게 무척 추해 보인다는 걸. 맥주가 나오고 첫 모금을 하기도 전에 여 사장이 내 어깨를 탁 쳤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여 사장이 뭐라고 말하는데, 안 들렸다. 그제야 내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음을 알았다. 딴청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여자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음이다. 이어폰을 빼고 여 사장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그 여자가 쌜쭉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유, 뭐하는데 여자가 불러도 못 들어요? 저 분이 같이 한잔하재요.”      


여사장의 호들갑스런 웃음이 음악도 없어 더 휑한 그곳에서 무척 어색했다. 게다가 그 여자의 예상보다 빠른 반응에 당황해 우물쭈물하는데 여 사장은 벌써 내 맥주잔과 기본 안주 그릇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저기도 혼자 왔는데, 잘 됐네. 오늘 비도 오고 얼마나 좋아.”      


중매쟁이마냥 왜 신이 난 목소리인지 모를 여 사장 말에 밖을 보니 그새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종일 반복 됐던 비였다. 마지못해 반응하는 냥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 여자의 테이블로 가 실례하겠다는 겉치레를 하고 과하게 쭈뼛대며 앉았다.      


“이 동네가 혼술 할 때가 없죠?”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는, 그래서 무척 어색하다는 티를 팍팍 내리라 마음먹었건만, 앉은 지 몇 초 안 돼 어색한 걸 못 참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 여자가 과도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긴 그래서 좋아요. 조용하니까.”     


내가 무심코 내뱉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사장님이 싫어하죠.”     


그 여자가 혼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참. 이 여자가 그 여자지.’      


오래 전 이 여자의 기억이 또 떠올랐다. 그때도 이 여자는 혼내듯 화를 냈었다. 


“술 잘 드세요?”     


그 여자가 대뜸 물었다.      


“네.”

“저도 잘 마시는데, 잘 됐네요. 근데 혹시 주사 있어요?”

“네.”

“주사 있다고요?”     

그 여자가 원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물었다.     

“네. 전 술 마시고 안 자는 주사가 있어요.”


그 여자가 깔깔대며 웃었다. 남들은 취하면 자리가 아무리 불편해도 머리만 닿으면 잘만 자던데, 난 술 때문에 잠든 적이 없다. 남들 다 취했는데 혼자 덜 취해서 결국 혼술 하는, 그래서 그걸 내 주사라고 여겼으므로 그 사실을 얘기했는데 그 여자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안 그래도 음악도 없어 우리 대화를 다 듣고 있을 여사장이 거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 사장이 톡 나섰다.      


“아유~ 니가 웃는 거 첨 본다. 얘.”     


얘, 쟤 하는 거보면 한두 번 온 거 같지 않은데, 그 동안 웃은 적이 없다니. 역시 심상찮은 여자였다. 싱거운 대화가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내가 시켰던 안주가 나왔다. 저 여자가 혹시 나를 기억하는 건 아닐까, 뭐 이딴 생각하느라 내가 뭘 주문했는지 몰랐는데, 안주가 나오고 보니 그 여자 앞에 놓여있는 것과 같았다. 그 여자는 마른안주에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있었다. 술 잘 마신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다른 안주 하나 시킬까요? 뭐, 육류나 국물 있는 거?”     


같은 안주가 두 접시나 놓여 있었고 소주를 마른안주에 먹는 그 여자가 걱정돼 든든한 안주 하나 시킬까 했다.      

“아니, 이거면 됐어요.”

“전 맥주니까 괜찮지만, 소주에 마른안주로 괜찮겠어요?”

“진짜 주당은 마른안주죠.”      


허세까지 있는 듯 했다.      


“그건 싸서 가져가고 다른 거 먹어.”      


내내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을 여 사장이 또 나섰다.      


“아이, 싸가긴 뭘 싸가. 구질하게..”     


정색을 하며 그 여자가 말했다.       


“다른 때는 꼬박꼬박 싸가면서 왜 그래?”     


매상 생각에 발끈해서 한 말인지, 눈치 없는 대꾸였는지 모르지만, 여 사장 덕분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 여자는 제 앞의 마른안주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없이 접시를 들어 내밀었고 여 사장은 또 아무 말 없이 접시를 받아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의도했든 아니든 충분히 웃긴 상황인데 그 여자의 표정에 웃음기가 전혀 없어서 난 그냥 메뉴판만 뚫어져라 봤다.  

     

“오늘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오늘은 혼자 술 먹기 싫고 그러네요. 괜찮죠?”       


고개를 떨구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고르라는 메뉴는 안 고르고 느닷없이 내게 담배 피우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같이 나가자고 했다. 안주도 맛없고 실내도 추레한 동네 술집이지만 그곳엔 어울리지 않게 테라스가 있었다. 여 사장이 좋아하는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비를 맞아 톡톡 흔들리고 있었다. 그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관뒀다. 왠지 이 여자에겐 안 어울릴 것 같았다. 아들과 마신 전작도 있겠다, 연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내뿜으니 기분이 알딸딸하게 좋았다. 빗속에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으니 문득 기억 속 이 여자가 어떤 여자였건, 그 기억은 잠시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동안 우울해서였는지, 한참을 여자 없이 독거노인으로 지내서인지 그냥 처음 만난 여자와 같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그런 야릇한 기분이고 싶었다.       


“우리 다른 데로 옮길래요?”     


그 여자가 물었다.      


“사실, 저 사장님 불편해.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뾰족한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말하는 폼으로 보아 아까 안주 문제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다. 내가 그러자고 하자 그 여자는 내게 우산은 있냐고 물었다. 잠시 비가 멎은 틈에 외출했던 터라 우산은 없었다. 그래서 하나의 우산을 같이 쓰는 상황을 상상했다.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 우산은 과연 클까 작을까 생각했다.      


“갈래요 말래요?      


자꾸 딴 생각하느라 즉각 반응이 안 나오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촉했다.      


“그럽시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테라스 너머로 탁 튕겨 버리고 일어섰다.      


“아이, 진짜. 담배 그렇게 버리는 사람 제일 싫더라. 왜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     


아차 싶어 얼른 담배꽁초를 다시 주워 와 재떨이에 버렸다. 아까 이 여자를 보자마자 떠올랐던 오래 전 그 기억이 반사적으로 또 떠올랐다. 그래서 잠시나마 야릇한 기분이 들고, 같이 우산을 쓰고 걷는 장면을 상상했던 내가 한심했다. 여 사장에게 우산을 빌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시킨 것과 내가 시킨 걸 나눠 계산했다. 나로서는 그 여자에 대한 배려였다. 내가 짐작한 그 여자는 남자랍시고 다 계산하면 오히려 화를 낼 여자였다. 그리고 난, 내 계산을 본 그녀의 표정이 살짝 난처해짐을 봤다. 술집을 나오자 그 여자는 말없이 혼자 앞장 서 걸었고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그녀가 한참을 걷다 멈춰 서 물었다.      


“노래 잘 하세요?”

“좋아하죠,”     


사오정 같은 대답을 하면서 올려다 본 건물엔 ‘7080 쉼터’란 촌스런 간판이 70,80년대 이발소 네온처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설마, 여기를?’     


그 여자의 나이는 모르지만 적어도 소위 ‘7080’을 갈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여자 나이는 당최 짐작도 못하는 나지만, 많이 봐서 40대라 해도 그곳은 그 여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그 동네 7080은 등산객들이 대낮에도 관광버스 춤을 추는, 남한산성 뒷자락에 위치한 이 동네 상징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가자는 건지 믿기지 않아서 내가 진심이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 여자가 말했다.     


“저 여기 단골이에요. 사장님도 잘 알고.”               

‘헉! 니가 자주 오는 곳이라고? 여기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까 주당 허세처럼 괜한 허세이길 바랬다. 그래서 물었다.      


“농담이죠? 여기 엄청 시끄럽잖아요. 아까 얘기하고 싶다고..”

“얘기는 나중에 하고..”     


내 말을 끊고, 던지듯 대답을 한 여자는 계단을 앞서 내려갔다.      


‘이런 싸가지..’      

그날 처음으로 욱했다. 그러나 상대는 여자 아닌가? 대화가 하고 싶다가 갑자기 노래가 부르고 싶을 수도 있지 뭐. 그래도 마귀소굴로 끌려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어서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퀴퀴한 지하로 따라 내려갔다. 역시 계단에서부터 악쓰는 건지 노래인지 모를 괴성이 진동하더니 문을 열자 홀에서 광란의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의 아저씨, 아줌마 무리는 세계 멸망을 앞둔 사람들처럼 그야말로 미친 듯이 흔들어 대고 있었다. 트로트 리듬에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어 제낄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종이 그곳에 있었다. 등산을 해서 그러니 관절이 다들 좋았다. 나도 그 나이 또래지만 도무지 자리에 앉기가 무서워서 맨 구석자리로 숨어들었다. 따라 앉을 줄 알았던 그 여자는 저 멀리서 주인 여자와 귓속말을 하더니 내게 잠깐 기다리라는 듯 눈짓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홀의 괴성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지 몇 분도 안 돼 일어나 우산을 챙겼다. 주방에서 술 쟁반을 들고 나오다 멀뚱해진 눈으로 보는 주인 여자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입구엔 그 여자가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그 옆엔 그 여자가 커서 그런지 확실히 작아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난 처음에 그 여자가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내는 나를 보자 얼른 그 여자와 거리를 벌리더니 딴청을 피우며 내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아니, 그냥 취하신 거 같아서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 여자에게 집적대려다 나를 보고 놀란 시츄에이션이란 걸 알아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 난 오지라퍼 아닌가?      


“당신이 이 여자가 취하건 말 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생각해도 틀린 말이고 오버였다. 여자가 취해서 혼자 있으면 당연히 걱정 해야지. 

그 남자는 아무런 대꾸 없이 내가 올라 온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이 여자는 통화를 끝냈는지 나더러 왜 나왔냐고 했다. 나는 정신 사나워서 못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우산만 들고 있는 내게 물었다.      


“내 가방은요?” 

‘응? 아차!!’     


얼른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다 조금 전 남자와 마주쳤다. ‘당신이나 나나 오늘 참..’ 축 처진 그의 어깨를 스치며 왠지 나도 같은 처지인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아까부터 저 여자 말에 재깍재깍 움직이는 내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가방을 두고 내 맘대로 나온 건 잘못이니까 냉큼 자리로 뛰어가 가방을 가져왔다. 밖으로 나와 가방을 쥐어주자 그 여자는 또 아무 말 없이 앞장 서 걸었다. 그 사이 비는 또 멈췄고 미처 하수구로 빠지지 못한 물이 도로가에 찰랑대고 있었다. 그 물에 슬리퍼 채 발을 담그고 서서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우울해서 혼술 하러 갔다가 우연히 저 여자를 봤고, 오래 전 기억이 떠올라 뒤돌아섰다가 어떤 여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무례하고 제 멋대로 인 여자인걸 알면서 따라다니고 있었다. 난 뭐가 궁금한 걸까. 어딘가 이상한 여자란 건 예전에 알았고 지금 보니 거의 확실한데, 난 뭘 더 알고 싶은 걸까. 답을 알지 못했지만 이상한 놈은 되지 말아야 생각에 그대로 집에 가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그 여자가 뭐라 소리치는 게 들렸다. 멀어서 안 들렸지만 안 따라오고 뭐하냐는 소리 같았다. 난 발길을 다시 돌렸다. 그 여자에게로.     


그 여자가 도착한 곳은 또 시끌벅적한 꼬치 집 ‘다리 두개’였다. 홀 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자를 쌩 까고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그 여자가 들어가다 말고 돌아와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밖이 시원하고 좋네요.”      


헛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이상한 놈은 되지 말자고 마음먹고도 따라 왔으니 이제 물어 나 봐야겠다 싶어서 그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저 기억 못하시죠?”     


처음으로 그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에? 절 아세요?”

“압니다. 아직 이 동네 사시는 거예요?”

“네. 근데, 절 어떻게 아세요? 이 동네 사세요?

“아뇨. 이사한 지 오래 됐어요. 가끔 오긴 하죠.”

“그런데 절 어떻게 아세요?”     


내가 이 여자를 처음 본 건 십 수 년 전, 그때 살던 집 앞 골목에서였다. 골목 끝엔 시멘트 절벽이 있었는데, 그 낭떠러지 아래에 쓰레기가 수북했다. 그 때문에 여름이면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대여섯 평 되는 그 절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건물의 두 건물주가 21세기 한국에서 그 땅이 서로 자기 영토가 아니라고 싸우는 희한한 곳이기도 해서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무인도 또는 난지도라 불렀다. 그러니까 그곳은 임자가 누군지 모른 채 동네 주민은 물론 구청도 내팽겨 친,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문제는 쓰레기가 아니라 그 골목이 아이들 놀이터라는 사실이었다. 경사진 그 골목에서 아이들은 바퀴달린 말이나 미니카를 타고 골목을 질주했다. 어쩌다 아이들이 가속을 못 이기는 순간엔 곧장 4미터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하필 내 방 창문이 바로 그 낭떠러지를 바라보고 있어서 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알람 삼아 츄리닝을 곱게 차려 입고 외출하듯 나갔다. 해가 안 드는 겨울이고 뜨거운 여름이고 간에 그 시간대, 아이들이 어린이 집을 마치고 어른들이 아직 퇴근하지 못한 시간, 그 골목엔 백수가 나밖에 없어서 아이들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땜질로 아이들 안전사고를 모면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부조리에 욱하는 오지라퍼인 내가 그 낭떠러지와 쓰레기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구청과의 지루한 민원 싸움이 결론이 안 나서 서울시를 상대로 또 몇 날 며칠의 긴 싸움 끝에 철제 펜스 설치와 쓰레기 처리를 구청에 지시하겠다는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을 약속 받은 날, 아마 그래서 아이들보다 더 신나서 같이 어울려 놀고 있었을 그날, 이 여자와 조우했다. 아이들 중엔 또래보다 조금 더 크다고 내 말을 무시하고 과속을 하는 애들도 있어서 녀석들을 다룰 때는 혼을 내기도 하고 했는데, 하필 그 순간을 이 여자가 봤다. 

     

“어이~ 아저씨. 왜 애들 잘 노는데 꼽사리 껴서 혼내고 그래? 할 일이 그렇게 없어?”     


기억하건데, 앙칼진 목소리와 중년 사내들이 쓰는 용어에 놀라 나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앉은 자세로 있었다. 황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이내 혀를 끌끌 차더니 말없이 골목 끝 어느 현관으로 사라졌다. 어린 아이들 대부분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중, 조금 큰 녀석이 상황 파악을 했는지 바닥을 구르며 웃길래 나도 같이 바닥을 굴렀다. 쪽팔렸다. 웃으면서 속으론 이 골목에  예쁜 여자가 이사 와서 좋긴 한데 참, 오지랖이 지랄 맞다고 생각했다.      


이 미지의 여자와 두 번째 조우를 한 건 그로부터 며칠 후, 대낮에 골목 끝 동네 호프집 파라솔에 앉아 역시 동네 형과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여지없는 동네 백수 모습이었다. 그때는 실내에서도 흡연을 하던 때라 우린 너무도 당연히 파라솔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때 도로에서 골목으로 오는 이 여자를 또 본 것이다. 이때가 이 여자의 ‘외관’을 확실히 이미지화 한 때였다. 허리와 목을 일자로 과하게 세우고 무진동으로 걷는 느릿느릿 도도하고 건방진 걸음걸이, 고개는 돌리지 않고 큰 눈만 굴려 먹잇감 찾듯 주위를 살피는, 태도만 공주인 여자. 난 멀리서부터 그 여자임을 알아봤다. 그 형의 어떤 말도 듣는 척할 뿐 눈은 그 여자에게 꽂혀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마침내 그 여자가 우리 앞을 지나칠 때, 동네 형이 하필 그때 담배꽁초를 바닥에 틱 던졌다. 비로소 먹잇감 찾은 그 여자는 눈썹이 씰룩대는가 싶더니 곧장 불벼락을 날렸다.   


“이런 씨발. 야! 니들. 왜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지랄이야?”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사람에게 욕과 반말부터 쏘는 모습에 기가 찼다. 며칠 전 예방주사를 맞은 내가 그럴 진데 앞에 앉은 형은 오죽했을까. 그 형이 눈을 번뜩이며 일어서는 순간, 나는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싶어 그 형부터 주저 앉혔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튀어가 그가 버린 담배꽁초와 그 옆의 몇몇 꽁초도 같이 주워 테이블로 가져와 가지런히 줄 세워 놓았다. 의도한 내 행동이 다행히 웃겼는지 그 형은 코를 벌름거리며 씩씩대기만 할 뿐 더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쯤에서 이 여자가 그냥 갔으면 될 것인데, 여자는 기어코 기름에 대고 성냥을 그었다. 길거리에서 냄새 나게 담배나 피우는 주제에 쓰레기까지 만들고.. 블라블라.. 나이 먹었으면 골목에서 모범을 보이라는 둥.. 대충 그런 훈계였는데, 이젠 그 형도 여자고 뭐고 물불 안 가릴 태세가 됐다. 나는 그 형을 말리다, 한편으론 여자에게 욱해서 당신은 뭔데 아무한테나 반말에 욕이냐고 가세했다가, 또 두 남자가 여자에게 대거리 하는 모양새가 남사스러워 그 형을 말리다, 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바락바락 대드는 이 여자에게 욱해서 당신이 무슨 경찰이냐, 단속반이냐 유치한 말싸움을 하다, 우르르 나와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 창피해서 미안하니 그만하자고 달래느라 기진맥진 했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대결’이 끝날 때까지는 몇 십 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 상황을 더는 세세히 기억 못하지만, 여자를 상대로 남자가 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우린 그저 삿대질이나 하고 두 배 모욕을 받고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그 여자가 혀를 끌끌 차며 뒤돌아서는 모습을 또 보는 것으로 끝난 것만 확실히 기억한다. 그 형은 그 뒤로 한참을 씩씩댔고, 나는 진땀을 식히느라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땀이 좀 식었을 때, 그 형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오지랖 넓은 또라이라고 했다. 그 형은 저런 여자를 넌 어떻게 아느냐고 했고 나는 모르는 여자라고, 딱 한 번 봤는데 그냥 꼴 때렸다고 했다. 그 형이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것 같아 며칠 전 상황을 얘기해줬더니 낄낄대며 웃었다. 그 형도 나와 같은 실없는 동네 백수였다.        


이 두 번의 사건이 그 여자를 예쁜 외모에 광대한 오지랖과 지랄 맞은 성질머리를 장착한 또라이 오지라퍼로 각인되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몇 번 동네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난 반사적으로 내 몸가짐을 살피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욱해서 그 여자를 노려보곤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개 무시하듯 나와 눈 한번 안 마주치고 지나쳤다. 그 사건 이후 일 년이 채 안 돼, 나는 이사를 했고 가끔 하는 출근길에 그 골목을 통과하며 낭떠러지 앞에 세워진 철제 펜스를 볼 때마다 억울한 감정과 함께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모를 당하고도 그 여자를 궁금해 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김없이 들었다.  


그때 그 여자가 십 수 년이 지나 내 앞에서 나를 기억 못하고 여전히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일부러 파라솔에 앉았지만 부질없었다. 하긴, 오지랖을 부린 상대가 한 둘이겠는가. 남자에게도 먼저 욕하고 대드는 드센(?)여잔데 그 기세등등한 오지랖 앞에서 깨깽한 남자 역시 한 둘이겠는가 싶어 이해는 됐다.

     

“아, 나 이거 무서워. 소름 돋았어.”      


내가 자신을 안다고 하자 처음엔 눈만 커졌다가 내가 대답은 않고 피식 웃기만 하니 몸까지 뒤로 빼며 그 여자가 한 말이다. 난 처음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형광등처럼 깜빡거리다 팍하고 든 생각에 아마 날 무슨 스토커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기가 막혔다.      


“우리 한 골목에 살았어요. 저 위에 난지도 골목.”

“아! 거기. 어? 근데 난 왜 모르지?”

“나랑 싸우기도 했어요.”

“에? 아하~ 나한테 뭐 걸렸었구나?”     


이 여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을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 수호자쯤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싶은 대목이었다. 그 낭떠러지 앞 사건을 얘기하려다 부질없는 짓 같아 관뒀다. 그 여자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곳이 금연구역이란 걸 당연히 알 여자가 태연히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자 그걸 예상한 내가 살짝 놀라웠을 뿐, 이상하지도 않았다. 수년 전 파라솔 담배꽁초 사건도 얘기할까 하다 관뒀다. 이제 궁금증이고 나발이고 그 여자와 대화도 하기 싫고 얼른 잔을 비우고 일어설 생각만 들었다. 아무리 여자라 한들 이렇게 제멋대로인 걸 두고 보다간 욱하고 말 내가 두려웠다.      


“아까 얘기가 하고 싶다더니, 애초에 얘기 같은 거 할 마음도 없었죠?”

“아뇨? 얘기해요, 우리..”     


내게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에 관해 확인 차 물어봤을 뿐인데, 그 여자는 눈치 없이 본격적으로 대화란 걸 하려고 했다. 


“근데, 지금까지 집에 안가도 돼요? 언니가 걱정할 텐데?”

“이혼한 지 오랩니다.”      


아뿔싸. 부아가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안 해도 될 말이었다. 차라리 그 핑계로 일어나야 했는데, 머리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머. 나도 이혼했는데..”     


그 여자는 주제를 제대로 포착한 듯 담배를 신발로 비벼 끄더니 일방적 ‘대화’를 시작됐다. 그 여자는 거의 울분을 토하듯 전 남편을 비롯해 친오빠, 시부모, 친정부모 등 관계자 전원을 호출해 순서를 섞어 욕했다. 시부모 간섭이 싫어 분가했는데 남자가 능력이 없었고, 오빠와 친정 부모는 원래 그 남자를 싫어해서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잦은 부부싸움 끝에 이혼했다는  둥.. 사연이라 하기도 뭣한 삼류 드라마 같은 그 상투성에 놀라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 여자에게 또 놀랐다. 후진 동네 꼬치 집 파라솔에서 찍는 신파극이 같아서 주위가 신경 쓰였다. 그 여자 얘기 중에 위로할 만한 얘기를 들은 바가 없으니 아무것도 위로할 게 없어서 처음으로 그 여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냅킨을 뽑아줬다. 눈물을 훔친 여자는 곧바로 가방을 열고 무슨 크림 같은 걸 찍어 눈가에 발랐다. 내가 듣느라 맥주만 마셔서 잔이 비어있자 그 여자는 내게 묻지도 않고 새로 맥주를 시켰다. 그러더니 이번엔 하소연을 쏟아냈다. 또 한참을 뭐라고 횡설수설하는 그 여자 얘기를 듣는 마는 둥 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당최 모르겠고, 그 여자가 지금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만 귀에 쏙 들어왔다. 우울증, 나도 겪고 있어 아는 병이니까. 


“우울증, 그거 생각보다 무섭더군요.”      


방금 전까지 어서 빨리 일어서고 싶었다가 여자가 아프다니 또 금세 동병상련 심정이 되는 나야말로 그 여자보다 더 심각한 합병증이다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튀어 나온 말이었다.      


“참 나. 됐어요, 됐어. 괜히 내 병에 대해 아는 척 하지 마세요.”     


그 여자는 혀를 끌끌 차던 옛날 그 표정으로 내 말을 끊었다. 병은 세상에서 자신만 앓아야 한단 말인가? 어이없어 본격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그 여자는 제 할 말 다했다는 표정으로 안주접시를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러더니 벨을 눌러 알바를 불렀다. 앳된 알바생은 우리 테이블에 오면서 미리 인상을 썼다. 그 여자는 닭볶음에 왜 닭이 이거밖에 없냐고 투덜댔다. 알바생은 우린 늘 똑같이 내보내는데 왜 올 때마다 그러시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알았으니 가보라는 말을 젓가락으로 했다. 대체 이 여자는 예전의 그 도덕의식과 하늘 찌를 듯 도도함은 어디 가고 시장 쌈닭 아줌마처럼 거칠어졌을까. 원래부터 그랬을까? 살면서 변질됐을까? 본디 되먹지 못한 걸 내가 못 알아보고 괜히 정체를 궁금해 했을까? 결국 내가 욱하고 말았다.     


“이봐. 원래 못된 거야, 아니면 살면서 그리 된 거야? 예의는 밥 말아먹은 거야?”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예의 같은 개념이 없어? 같잖은 사연이라도 들어줬더니 예의 없이 상대 말이나 자르고. 여기 금연인데 알바가 아무 말 안하면 고마워해야지 애꿎은 알바한테 왜 시비야? 알바가 안주 만드나?”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 삐끼지? 아까 거기 7080. 아, 삐끼가 아닌가? 호객해서 같이 술 먹고 수당 받는 걸 뭐라 그러지?”     


아까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동네 호구로 보인 게 열 받아서 내친김에 몰아 세웠더니 이제 그 여자의 낯이 굳었다.     


“아까 들어가자마자 눈치 깠는데, 당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그게 궁금해서 참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안주 하나와 소주 한 병을 더 시켜주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막 파라솔을 지나치는데 그 여자가 내 팔을 붙잡고 말했다.        


“저기요. 저 호객한 거 아니에요. 이제 그런 거 안 해요.”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호소하듯 말하는 그 여자의 표정은 뭐랄까, 당황스러운 듯, 억울한 듯, 하여간 복잡해 보였다.      


“그럼, 거긴 왜 갔는데?”     


그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말을 하지 못하다 겨우 한마디 했다.      


“......전 거기 가면 술값 안 내도 돼서..”     


아씨. 그때의 내 심정은 뭐랄까, 그 말에 속이 쓰렸다가, 여자를 궁지로 몰아세운 나쁜 놈이 된 기분에다가, 결국 왠지 화가 났다가, 하여간 엉망이었다. 그러나 욱한 이상, 뒤도 안 보고 집으로 향했다. 큰 길로 나오자 침이라도 퉤 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몇 초를 못 갔다. 내가 술값을 다 계산하리라 믿었는데 수틀렸으니 술값 걱정하느라 혼자 앞장 서 걸은 건 아닐까, 첫 번째 술집에선 무슨 돈으로 계산 했을까, 저리 잘난 척 하는 여자가 지금 느꼈을 수치심은 또 얼마나 클까,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는 날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삐끼 질이나 하는 여자라 한들 새벽에 술집에 혼자 두고 온 게 기어이 마음에 걸리는 내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오늘 발길을 돌린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아오~ 이거 오지랖도 병 중 상병이구만.’     


오지랖이 아니라 병이 아닌 가 의심이 들었다. 오래전 사건 이후 궁금했던 게 무색할 만큼 정체가 적나라한데, 기분이 간단하지 않고 잡탕인 나를 이해 못하겠다고 씩씩대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다시 걸어 도착한 꼬치 집 파라솔엔 그 여자가 없었다. 그새 집으로 갔나보다 생각하니 불안했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큰길로 나왔다. 저 멀리 휘청거리며 걷는 키 큰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만 비추고 인적도 드문 대로변을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눈치 못 챌 만큼 거리를 두고 뒤를 졸졸 쫒았다. 불안 불안하던 그 여자는 급기야 4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했다. 도로에 차가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뛰어가 붙잡을 뻔 했다. 그 여자를 놓칠 수 없어서 나도 무단횡단을 했다. 이윽고 그 여자가 예전 그 골목이 아닌, 다른 골목 어느 다가구 주택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난 비로소 내가 가야 할 집으로 마지막 발길을 돌렸다. 문득 그 여자가 현관 앞에서 몸을 홱 돌려 나를 봤다면? 하는 엉뚱한 상상에 몸서리가 쳐졌다. 역시 스토커 맞지 않느냐고 뺨따귀를 때렸겠지.

        

집에 와서 누웠지만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술집 유리 너머로 그 여자를 본 이후부터 모든 시간, 내 행동이 이해가 안 돼 화가 났다. 편의점 맥주를 사다 놓고 일기장을 열었다. 뭔가 정리를 하지 않으면 날밤을 샐 것 같았다. 정체가 궁금했던 그 여자는 만난 지 얼마 안 돼 쉽게 파악 됐다.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그렇게 망가졌는지, 원래 그랬던 것인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 여자 문제고, 진짜 문제는 그런 여자란 걸 대충 예상했으면서 뭔가 더 궁금하다고 졸졸 따라다닌 나였다. 왜 그랬을까? 보통 남자라면 과거에 그런 수모를 두 번이나 겪고도 그 여자를 다시 봤다고 술자리에 합석을 했을까? 캔 맥주를 두 개 정도 비웠을 때 희미했던 추측이 윤곽을 드러냈다. 혼자 도덕의 화신인 냥 도도한 그 여자의 모순을 확인하고 그 여자에게도 짚어주고 싶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내가 욱해서 터졌을 때 옛날 얘기까지 꺼내 현재 그 여자의 모순을 지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나는 횡단보도 정지선에 걸친 차량 운전자를 향해 기어이 손가락질을 하는 이들을 경멸한다. 반대로, 깜빡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로 뛰어드는 사람에게 욕을 하는 운전자도 경멸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인지하기도 전에 신호가 바뀌어 정지선을 넘은 경우도, 급한 마음에 횡단보도에 뛰어든 경우도 있을 터인데, 얼마나 틀림없는 생활들을 하기에 눈을 부라리며 제 의식을 자랑 못해 안달일까 궁금하다. 입장 바꾸지 못하고 씹선비질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그 여자에게 투사한 걸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외모만 믿고 아무 남자나 제 앞에서 껌뻑 죽을 줄 아는 여자를 경멸하는 내가 그 여자에게 착각임을 확인 시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상기해보니, 꼬치 집에서 내 팔을 붙잡은 그 여자의 복잡한 표정에서 어떤 통쾌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일기장 끝부분에서 내 추악한 욕구가 추측되자 일기장 전체를 지워버렸다.       


‘그런 상대의 모순을 확인하고, 확인시키고 싶은 나야말로 더한 놈 아닌가? 변태인가? 치료 받을 것. 특히 오지랖부터..’ 라고 새 페이지에 쓰고 컴퓨터를 껐다.       


다음 날 초저녁에 우산을 돌려주러 그 술집에 갔다. 역시 손님도 음악도 없이 적막한 곳에 여 사장이 역시 호들갑스럽게 나를 반겼다. 여사장은 우산을 건네는 나를 막무가내로 자리에 앉히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제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술 먹다 헤어졌다고 부러 싱겁게 얘기했다. 여 사장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얼굴로 ‘엥? 그게 다야?’ 라고 물었다. 여 사장의 기대는 짐작 가능했다. 성인 남녀가 술집에서 만나 합석을 하고 술을 더 먹으러 갔으니 뭔가 드라마틱하거나 찐한 후일담을 기대했겠지. 여 사장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혹시 그 애 좀 이상하게 굴지는 않았어요?”

“글쎄 좀..”

“별 일 없었으면 다행이고.. 난 혹시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했다구요.”     


드물게 드나들었지만, 그래도 여사장은 나를 안지 십년이 훨씬 넘었다. 내 욱하는 성질을 알고 있었고, 그 여자의 지랄 맞은 성질도 알고 있었다. 여 사장은 시키지도 않은 맥주를 따라오며 그 여자에 대한 보따리를 풀었다. 그에 의하면,      


그 여자가 그곳에 나타난 지는 두 달쯤 됐다. 그 여자가 그곳에 처음 왔을 때, 안주가 비싸다고 투덜댔고, 두 번째 왔을 때는 감자전에 감자가 적다고 투덜대서 여사장은 그 여자를 무척 못 마땅하게 여겼다. 감자전은 서비스로 줬기 때문이었다. 여 사장은 마음에 안 드는데 일부러 올 필요 없다고 했고 그 여자는 알았다고 하고는 계속 왔다. 그 여자는 주로 혼자 왔는데, 옆에 남자들이 있으면 자주 시비가 붙었다. 남자들의 대화가 못마땅한 게 이유였다. 어떤 남자일행이 혼자 먹는 그 여자에게 술 한 병을 시켜줬더니 수작 거는 거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딱 두 번, 남자와 같이 왔는데, 그 여자보다 어렸고 그들은 여자의 담배 심부름도 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오지라퍼가 많은지 여사장의 오지랖도 만만치 않았다. 여사장은 그 여자가 올 때마다 냉장고에 유통기한 마감이 임박한 안주 재료를 싸주고 손님이 먹다 남은 안주와 술까지 싸서 쥐어줬다. 혼자 와서는 이래저래 시비가 붙었다가 갈 때는 양념만 남은 안주도 싸가는 모습을 보고 그 여자의 형편을 짐작한 여 사장의 오지랖이었다. 조금 친해지고 난 후 여사장은 취할 대로 취한 그 여자를 데리고 그 여자 집엘 갔다가 예상보다 훨씬 더 궁하게 사는 걸 확인했다. 아직 젊은데 왜 일을 안 하냐고 물으니 공황장애 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했다. 술은 무슨 돈으로 먹느냐고 했더니 가끔 부모님이 부쳐준다고 했다. 

          

난 빈 생맥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욕하던 부모에게서 용돈을 받아 술을 먹고, 공황장애를 겪는 여자가 삐끼를 했다니 한심했다. 그러나 여 사장이 묘사한 그 여자의 생활 모습을 듣는 순간부터 마신 게 벌써 두잔 째였다. 전날 술값 때문에 곤란했던 그 여자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다 오지랖 병이 또 도지겠다 싶어 여 사장이 한 잔 더 따르려는 것을 만류하고 막 일어서려는데 여 사장이 전화를 받더니 일어서는 나를 제지했다. 영문도 모르고 여사장의 손바닥 아래에 눌려 앉아있는데, 전화를 끊은 여 사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그 앤데, 어떡하죠? 사장님 오시면 자기 전화번호 드리라고, 꼭 연락 바란다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네?”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 어제 무척 수치스러웠을 텐데. 이 여자가 없어 보이는 내게 바라는 건 뭘까? 내가 대답을 않고 뜸을 들이자 여 사장이 또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전화번호 드릴까?”     


대체 여 사장은 왜 이럴까?     


“사장님은 내가 그 여자랑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 여자 이상하다면서?”

“걔가 이상하긴 한데, 불쌍해. 그 애가 사장님 같은 사람 만나면 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같은 오지라퍼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여사장의 오지랖은 허무맹랑했다.      


“내가 뭐라고 그 여자가 변해요? 난 관심 없으니까 엮으려고 하지 마세요. 나 욱하는 거 알면서 괜히 사고 치게 하지 말고 그냥 그 뒤로 안 왔다고 하세요. 왔는데 전번 안 받아 갔다고 하지 마시고. 아픈 여잔데 자존심은 살려줘야지.”

“아니야. 난 사장님하고 걔가 어울린다고 봐. 걔가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그러지만 진짜 센 남자한테는 껌뻑 죽어. 지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그런 남자 만나야 정신 차린다고.. 사장님 세잖아?” 

“내 어디를 보고 세다고 그래요? 성질 더럽다고?”

“아이, 몰라. 하여간 내가 보기엔 사장님하고 어울려.”     


여 사장은 카운터로 총총 뛰어가 메모지를 찾는 듯 했다. 그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나 막무가내라니, 헛웃음 났다. 하여간 분별없는 오지랖은 어딜 가나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이거야 말로 오지라퍼 셋이 벌이는 허무개그 같았다. 아니, 막장 시트콤이 어울릴 것 같았다. 난 여 사장이 부르는 소릴 못 들은 척 얼른 나와 버렸다. 

     

술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장마도 아니고, 내 오지랖만큼이나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그렇다고 다시 우산을 빌리러 술집에 갈 수는 없었다. 아니, 앞으로 아예 못 갈 거 같았다. 차라리 비를 맞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걷다 문득, 만 하루를 뭔가에 집중했던 탓인지 우울증이 조금 가라앉아 있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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