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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an 06. 2023

의사와의 악연 1화

성인이 된 후론 의사를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만 믿는 것인데, 내가 정한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의 구분 기준은 능력보다 신뢰에 기반하고 그 신뢰는 결과보다 태도에 기반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두고 볼 때, 환자는 절대적으로 약자다. 전문지식이 없는 환자는 질병 앞에서 절대적 불안상태에 있기 마련이다. 심할 경우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의사 앞에서 환자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반면에 환자 앞의 의사는 절대적 권위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의사의 친절은 불안 상태의 환자에게 있어 실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의사를 믿지 못하게 된 건, 절대 약자인 환자가 비굴을 감내하면서까지 비전문적 의견을 피력할 때 보이는 권위적 냉소와 자기들 밥그릇에는 그리 맹렬하면서 다른 노동자의 파업에 연대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다. 그러나 그건 근래의 얘기이고, 의사를 온전히 믿지 않게 된 보다 근본적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의사와 꼬였던 내 경험 때문이다. 확실히 경험은 확률과 이성을 지배한다.     

*세상 모든 의사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하나마나한 말은 안 하련다.   

      

기억 내에서 첫 번째 악연은 군 시절이다.

난 보통 일병 말호봉이나 상병 때 받아야 할 아들(부사수)을 병장 2호봉 때 받았다. 그전 해부터 훈련소 차출 병력이 모자랐던 게 이유였다. 내가 있던 부대는 꼴에 특수부대라고 각 훈련소에서 차출된 인원으로만 이뤄진 부대였는데, 어째 아들이라고 들어온 놈이 비리비리하니 영 탐탁지 않았다. 부사수의 실수마저 사수가 책임져야 하는 관계라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자대 배치받은 날 저녁 신고식 시간, 녀석은 공주에서 음악다방 디제이를 하다 온 놈이라며 발라드 팝송을 불러 제꼈다. 그리고 지 혼자 감정에 북받친 나머지 훈련소 차출 인원 중 체력 테스트도 통과 못한 자기를 이곳에 왜 데려 왔는지 모르겠다며 하늘 같은 고참들 앞에서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트로트를 부르며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팝송을 부르다 신세한탄을 하다니. 나도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부대 역사상 신고식 때 신세한탄 하는 놈은 저놈이 처음이라며 내 위 고참들은 병장이하 전원을 옥상 집합시켰다. (나중에 인사계 상사가 부대 총원 부족이라는 비상사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응급대책이라 변명했지만, 그의 알콜 중독을 알고 있는 우리 고참들은 지금까지도 낮술 먹고 취해서 데려 온 것이라 믿고 있다.)   

   

녀석이 비실하고 한심해도 우리 고참들이 부대 내 인사사고라도 날까 봐 녀석을 애지중지(?)한 덕에 녀석은 두어 달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느 일요일, 전투 축구를 하다가 공을 가운데 두고 녀석의 발과 상대의 발이 맞부딪힌 후 엉뚱하게도 녀석의 무릎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물렁한 공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이 사건 역시 부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몇 시간 후 녀석은 오른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한 채 나타났다. 나를 포함한 부대원 모두 두어 달 지나면 멀쩡한 다리가 될 줄 알았는데, 깁스를 풀던 날, 녀석은 이제 불구가 됐다고 또 목 놓아 울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간 뼈만 부서진 줄 알았는데, 깁스를 풀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인대가 이미 끊어져 이젠 말라붙었다나? 그래서 다시 접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명한 군의관의 소견이랬다. 관절이 부서져 온 놈에게 처음부터 인대를 의심하지 않은 군의관이란 놈은 과연 돌팔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밖이라면 당장 쳐들어가 멱살이라도 잡든가 의료소송을 걸든가 하겠지만, 그곳은 군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대장과 부대장께 화풀이하고 의병 제대를 권고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곳은 군대였다. 부대 내 간부들이 내린 결정은 PX(부대 슈퍼) 병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부대 내 인사사고로 인정하는 순간, 부대장은 물론 간부들 진급에 끼칠 악영향 때문이란 건 안 봐도 뻔 한 결정이었다. 그때까지 면회 한 번 안 오신 녀석의 부모님과 돌팔이 군의관 새끼 때문에 어쩌면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할 팔자를 얻고 만 녀석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밤마다 라면에 소주를 먹이는 것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 역시 녀석처럼 팔자에 없던 병을 얻게 된다. 당시 우리 소대는 장교가 부족해 (왜 우리 부대는 허구한 날 병력이 부족한지..) 부사관인 중사가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는 툭하면 나와 트러블이 생겼었다. 안 그래도 불만이 많던 차, 녀석과 반합 라면에 소주를 마시던 어느 날, 야간 당직을 서던 소대장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병장인 나야 지적 정도로 끝났지만, 소대장으로서 부사수의 의병 제대하나 처리 못한 무책임한 놈이 장애인이 된 부사수에게 실실거리며 얼차려를 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꼭지가 돌아버렸다. 술주정처럼 불만을 얘기하다 급기야 멱살잡이에 이어 주먹을 치고 박는 싸움까지 하게 됐다. 이유야 어쨌든 하극상이 분명하니 나는 영창감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대장은 강등됐고 난 사흘간 ‘나 홀로 목봉’이라는 기합 처리로 마무리 됐다. 때마침 군사 훈련 중 가장 규모가 큰 팀 스피릿 훈련 (한, 미 합동 훈련)이 예정 돼 있었고 조(분대) 별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부대는 (늘 총원이 부족했으므로) 나 (분대장) 없인 훈련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나 홀로 목봉이라는 가공할 기합을 악을 쓰고 수행한 마지막 날, 취침 중 옆구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통증이 어찌나 심했던지 비명도 못 지르고 옆의 쫄따구를 꼬집어 깨웠다.

      

그날 밤 곧바로 헬기로 이송된 국군 청평 병원에선 진통제 하나 못 먹고 꼬박 반나절을 침상 대기했다. 첫 번째 엑스레이 사진을 본 군의관은 다짜고짜 의무병 머리를 후려쳤다. 사진에 가슴 한쪽이 아예 하얗게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필시 의무병이 엑스레이를 잘못 찍었다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똥 씹은 얼굴로 뒷욕을 하는 의무병에겐 미안하지만 사실이길 바랬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다시 찍어도 사진은 달라지지 않았다. 군의관의 편견 때문에 의무병과 난 반나절을 대기하고, 찍고, 욕먹고, 다시 찍고를 되풀이한 것이다. 아무리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라 해도 군바리의 호소는 군기 빠진 엄살로 치부됐다. 휠체어에 앉고 일어설 때마다 옆구리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끼며 병장 계급장으로 장교고 나발이고 콱 들이받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먹었다.

      

“늑막염 같은데, 물이 너무 많이 차서 여기선 안 되겠다. 통합 병원으로 가라.”

     

군의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태연히 말했다.      


“이런 개새끼.”      


반나절을 고문받는 기분으로 버텼건만, 무슨 감기 진단하듯 말하는 군의관에게 부아가 치밀어 욕이 튀어나왔다. 줄곧 나른했던 군의관의 눈이 그제야 소눈깔만큼 커졌다. 의무병이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내 휠체어를 끌고 나갔다.  

    

“니가 의사냐? 내가 사제인 되면 너부터 국방부에 민원 넣는다. 개새끼.”     


의무병에게 질질 끌려가며 소원수리조차 검열하던 시절에 씨알도 안 먹힐 협박(?)으로 욕을 해댔다. 민첩한 의무병 덕분에 두 번의 하극상 사건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덕분에 진통제를 못 받았다.

      

그날 저녁, 결국 난 마산행 군용 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다음 날 아침, 통증에 시달리며 도착한 군 마산통합병원에서 다시 한번 엑스레이를 찍었다. 다행히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났다. 처음으로 군의관과 마주하고 발병부터 증상까지 설명할 기회가 내게 주어졌지만 군의관은 설명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저 폐와 갈비뼈 사이에 찬 물을 빼야 한다고만 했다. 난 옆구리에 칼이 그어지고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상상을 했다. 산전수전, 공중전도 다 겪은 육군 병장이었지만 아직 칼을 맞아본 적은 없어서 긴장이 됐다. 그래도 그까짓 거 하나도 겁 안 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옆구리 쨀 때 마취는 하느냐고. 그러자 군의관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호스로 쪽쪽 빨아 뺄 거니까 걱정 말라고.


‘가만. 폐에서 목구멍으로 이어진 호스를 쪽쪽 빤다고?’


옆구리를 가르지 않는다니 다행이지만, 내 얼굴에 맞대고 더러운 체액을 빠는 군의관을 상상하니 이번엔 소름이 끼쳤다. 실실 쪼개는 표정을 보니 변태가 아닐까 의심이 됐다. 그런데 수술실로 옮겨진 후 군의관은 어디 가고 대신 예쁘게 생긴 간호장교가 보통의 장교가 쓰는 나무 지시봉 대신 쇠꼬챙이를 들고 내 곁을 서성였다. 여군복은 참 볼품없는데 간호장교 제복은 왜 그리 섹시한지. 하얗게 칼 각 잡힌 제복에 미끈한 다리의 간호장교가 은빛 반짝이는 쇠꼬챙이를 들고 있으니 약간 변태적 성향이 의심되면서 원래 군 병원엔 변태가 많나 보다 했다. 그런데 간호장교가 그 지시봉으로 내 옆구리를 가리키고 다른 간호사가 소독약으로 박박 문지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 쇠꼬챙이가 내 옆구리를 푸욱 파고들었다. ‘흐헉!’ 이번에도 비명도 못 질렀다. 군바리라 마취까지 필요치 않다고 여겼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고는 하고 찌르든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서 칼침 아니, 꼬챙이 침을 맞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예쁘기까지 한 여장교에게 꼬챙이 침을 맞으니 이상한 배신감이 들면서 참, 기분 더러웠다. (나는 이 벼락같은 꼬챙이 침을 몇십 년 후 다른 이유로 또 맞게 된다.)

     

호스로 쪽쪽 빨아 뺀다고? 그걸 농담이랍시고 실실거린 군의관 개새끼와의 악연은 입원실로 옮겨진 후, 퇴원할 때까지 이어졌다. 입원실에서 군의관은 물이 완전히 안 빠졌다며 이제는 약으로 말리겠다고 했다.


‘응? 아니, 약이 얼마나 뜨겁길래?’


난 기겁을 했다. 군의관은 뜨악해하는 내게 어떤 설명도 없이 다른 병실로 사라졌고, 그날 저녁 내 침상엔 수통만 한 대형 물컵이 놓였다. 그리고 아침 6시, 기상과 함께 다른 병사들이 점호를 받을 때 난 주먹 한 가득한 약을 삼키고 10분 이내에 쓰러졌다. 공복에 독한 약을 쓸어 넣으니 약에 취해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약 복용한 지 단 하루 만에 ‘약으로 물을 말린다’는 의미와 물통이 왜 그리 큰 지 다 이해됐다. 그 독한 약을 복용한 지 한 달이 안 돼 얼굴 전체에 좁쌀만 한 두드러기가 퍼졌다. 병실 담당 간호 장교는 독한 약 때문에 간에 무리가 가서 그렇다고, 이제 주사로 투여하겠다고 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주사를 놓을 일이지 간을 혹사시키고 나서야 주사를 결정한 이유는? 주사약이 그리 비싼가? 국방 예산이 그리 부족한가? 군의관 개새끼.’           

그로부터 또 한 달 후, 그 불친절하고 느끼한 군의관과의 악연이 절정에 달했다. 제대 날짜가 세 달도 안 남았는데, 도무지 퇴원시킬 기미가 안 보였다. 뭔가 싸한 예감에 군의관과 어렵사리 면담을 잡았다. (그땐 환자와 상담이라 하지 않고 면담이라 했다. 그만큼 환자 상태에 대한 정보는 일방적이었다.) 언제 퇴원이 가능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내게 군의관은 내 질문이 무척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진단이 12개월짜리인데 두 달 지나고 벌써 퇴원 얘기를 하냐는 것이었다. 난 치료기간에 관해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아파서 일찍 의병 제대했다는 얘긴 들었어도 아파서 군 생활을 더 했다는 얘기 또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이없어하는 내게 군의관은 군대에서 얻은 병은 군대에서 낫고 제대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병원이라도 군대는 군대였다. 무엇 하나 내 맘대로 할 자유도 없고 까라면 까야하는 곳. 그곳에서 1년 가까운 세월을 더 지내라니 하늘이 노래졌다. 그 잔인한 말을 너무 당연한 듯 근엄한 얼굴로 말하기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군의관 실을 나왔다. 침상에 누워 울고 싶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역시 군대란 그런 곳이었다. 허황되고 불합리한 지시나 상황도 법으로 여기고 순응하며 사는 곳. 그런 곳에서 침상 달력에 날짜를 하루하루 지워가며 이년 반을 이 악물고 버텼건만, 기껏 병이나 얻어가지고 제대마저 연기되는 이 상황을 생각하니 뜬금없이 허약한 부사수 놈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희한도 하지. 한참 꺼이꺼이 울고 나자 속이 좀 편안해지면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군대서 얻은 병은 군대서 낫고 나가야 하는 그런 군법이 과연 있을까?’


저것들이 군대 이미지 제고를 위해 꾸며낸 자기들만의 관습법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병장 말년까지 보아 온 군대란 늘 그런 식이었다. 고참은 하나님과 동기라며 고문과 다름없는 얼차려와 무자비한 구타를 군기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듯, 허황되고 허술한 관례를 신의 말씀처럼 여기며 법처럼 강요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장교랍시고 사병을 하찮게 여기는 군의관의 말은 어쩌면 관례를 법처럼 여기도록 하기 위해 괜히 근엄한 표정으로 내뱉은 구라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었다. 그간 보아 온 군 간부들 행태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만했다. 이년 반 동안 보아 온, 뭔가 께름칙한 명령을 내릴 때 더욱 근엄해지는 장교들 얼굴을 떠 올리니 어떤 확신이 생겼다. 만약 그렇다면 대한민국 청년의 최대 관심사인 군 복무 기간을 놓고 감히 현역 사병을 농락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욱해서 제정신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병실 최고참이 침대 엎드려 울었으니 병실 내 환자들 모두 침상에서 부동자세가 되어 눈동자도 못 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육군 말년 병장이지? 전쟁 나면 총도 제대로 못 쏠 군의관 주제에 감히 육군 병장을 농락해? 군의관 너, 하나님과 동기인 육군 병장 맛을 보여주마.’         


그날 밤 혀를 내두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누구라도 집요함에 질릴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 치밀함이란 다음 날부터 하루 두 번 군의관실 앞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군의관 출근 시간에 한 번, 퇴근 시간에 한 번. 단, 식사 시간만 빼고. 또 그 집요함이란 마주칠 때마다 퇴원시켜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며 조르는 것이었다. 군의관은 처음엔 개 무시하거나, 날 밀쳐버리고 진료실로 들어가 버리거나, 휠체어를 타고 쫓아오는 나를 피해 종종걸음을 치고 일부러 계단을 빙빙 돌아다녔다. 그러나 육군 말년 병장의 집요함을 피할 순 없었다. 진료실까지 따라 들어가 책상 앞에 드러눕고 질질 끌려 나오면 문 앞을 딱 막고 드러누워 버텼다. 그러나 그 군의관은 내게 욕을 하거나 나를 질질 끌어내기만 할 뿐, 구타하진 못했다. 자기는 의사고 나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육군 병장이니까. 환자에게 얼차려를 줄 수도 없고 하니 나를 피해 일부러 당직을 서는 것도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주도면밀하고 집요한 계획이었다. 물론, 계획에 없던 헌병을 부르면 어쩌나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걸 보면 자신도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제대기간 연장 사유가 군법과 무관하다는 확신과 함께 기싸움에 자신이 붙은 나는 밥도 안 먹고 종일 진료실 문 앞에 누워 있기도 했다. 다른 환자들이 감히 말년 병장을 밟고 넘어 진료실을 들어갈 수 없으니 군의관도 난감했을 테다. 결국 군의관은 한 달을 못 견디고 내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야. 나가라 나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부딪히지 말자.”           


군의관에게 퇴원 명령서를 발부받던 날,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전역하시면 연락 한 번 하시지 말입니다?”

     

지금도 그들을 떠 올리면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한때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의사인들 군인이고 그들이 복무하는 곳이 군대인 걸 어쩌겠나. 하지만 군인이라도 의사라면 달라야 했단 생각을 제대 후 일반 병원을 다니면서 했다. 난 제대 후 한 달 만에 완쾌했다. 그것도 동네 의원 수준의 병원에서 말이다. 아무리 군대 의료와 질 차이가 난다지만, 치료기간이 거의 일 년 차이가 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군 의사들이 군바리라고, 사람 몸을 국가 소모품 정도로 치부했단 생각을 지금도 떨칠 수 없다. 실제로 내 군 생활 내내 ‘너희 몸은 이제 너희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계급이 깡패인 군 사회의 군인 신분이라도 적어도 비전투 인력인 의사들은 청춘 나이에 억지로 끌려온 인간을 보급품 취급하지 말았어야 했다. 의사답지 않은 것들이 가운 입고 의사 행세하기 때문에 순둥이 내 부사수는 지금도 장애인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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