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가급적 정치와 군대, 축구 얘기는 하지 말라던데, 이유는 나도 안다. 정치 얘기는 각자 정치적 이념과 입장이 달라서 논쟁되기 십상이고, 축구 얘기는 여자들에게 십중팔구 맨스 플레인이 될 테고, 군대 얘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빡센 군대 생활을 한 것처럼 과장된 허풍일 게 뻔하니 특히, 여자들의 하품을 유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일 테다. 거기다 군대서 축구한 얘기가지 나아가면 같은 남자도 질려버릴 것이다. 그래도 난 할란다. 하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2년 반의 나의 군 생활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억울하고 기막힌 시절이었으며, 곧 군대를 갈 내 아들 때문에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하신 공약 중 모병제 현실화를 가장 고대했던 이유가 됐고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의 군 면제에 대해서도 찬성하게 된 이유도 됐다. 그러니까 군대는 무조건 가고 싶은 사람만 가야 한다는 게 내 확고한 신념이 된 이유가 내 황당한 군 시절 때문이란 얘기다. 이로써 정치와 축구 얘기까지는 다 했다. 그렇다고 내 군 시절이 너무 힘들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푸념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군 생활이란 게 얼마나 어이없을 수 있는지, 얼마나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는 곳인지, 그래서 군대가 한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만 말하고 싶다.
군대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냐고. 안되면 되게 하라고.
어딨긴. 존나 많더라.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또 제대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열심히 하면 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뭐가 돼있긴 한다. 목표한 것이 아니어서 문제지. 그래서 삶의 방식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과연 팔자란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존재하는데 지지리도 운 없는 팔자를 타고났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있을까?
지지리도 운 없는 현실에서 탈출을 꿈꾸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차라리 위안거리라도 찾는다.
점집이 줄지 않는 건 사주팔자라는 과학으론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단정도 못 짓는 어마무시한 동양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명리학이란 오래된 학문은 그 존재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니 나 같은 무신론자도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나 잘났다고 믿고 존나 열심이면 그에 맞는 보상이 따르리라 무조건 ‘열심’을 외치며 산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살았다. 그 의구심엔 군대에서의 기억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점집을 두어 번 갔었다. 직장을 때려치고 변수까지 고려해 가면서 나름 치밀한 구상으로 시작한 첫 사업이 보란 듯이 예상을 뛰어넘는 난항의 연속이었고 몸까지 이상신호를 여기저기서 보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에 갔었다. 열심히 하는데 왜 사업이 안 풀리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첫 번째 역술인은 내 허리 통증을 기막히게 맞췄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삼재니 뭐니 하면서 내년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위안을 주며 조금만 더 버티라고 했다. 근데, 다음 해에도 반전 따윈 없어서 기어이 사업을 말아먹었다. 다른 사업을 준비하면서 또 점집을 갔다. 이번 역술인 역시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물었고 사주가 좋다고 했다. 내 성격의 장단점과 하고 싶은 사업의 종류를 물었다. 다만, 내 적성과 맞지 않는 사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인문학적 질문을 했다. 덧붙여 사람의 마음이나 말, 생각 등은 에너지가 강력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내면화되어 스스로의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점쟁이가 할 말은 아니어서 왠지 더 신뢰가 갔다. 다만, 내 몇 마디로 내 적성을 판단했다는 게 의심스러워 무시하고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또 말아먹었다. 두 번째 역술인이 한 적성이란 말만 곱씹으며 다시 직장인으로 복귀했다.
팔자. 운. 이 단어들은 어쩌면 그저 현재의 불행을 설명할 합리적 방도가 없을 때 찾는 편리한 도피처일 수도 있지만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엉뚱하거나 노력과 반대되는 결과를 맞으면 더욱 믿게 되는 속성을 지녔다. 다른 이가 자신의 팔자를 탓할 때 그의 인생을 직접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상관관계를 입증할 수 없으나 내가 겪어 온 경험들이 ‘운’이란 존재 불확실한 놈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우연’이 내 삶을 지배했단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이에 접어들어 다시 생각하니 그 우연도 내가 만든 필연일 수도 있다는 미궁에 빠졌지만 말이다. 오십이 훌쩍 넘은 지금도 난 모르겠다. 운이란 게, 팔자란 게 있는 건지.
어쨌든 이 나이에 깨달은 건 선택은 두 가지라는 거다. 인생 반전을 위해 모험을 하거나 자신의 긍정 에너지를 믿고 끈질기게 삶을 가꾸거나.
이제 시작될 일화들은 절망과 희망, 운과 노력, 때론 지치기도 해서 팔자를 믿기도 했다가 ‘그 따위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며 끈질기게 긍정 에너지를 찾아 헤맨 내 삶의 과정이기도 하다.
한낱 추억일지, 지금의 나를 구성한 의미 깊은 경험으로 해석될지는 다 쓰고 봐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