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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ty 묘등 Apr 01. 2021

'살가움'과 '헤픔'의 차이

[도덕경 제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상호 관계성 확인


직장 동료이자 상사로 인연을 맺은 16년 지기 A가 오전 산책길에서 한숨 쉬듯 이야기합니다.

“내가 헤프다고 비난했던 B가 네가 이야기한 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야 너와 오랜 시간을 가까이 지내다 보니 네가 여성 직장인의 기준이 됐나 봐. ”


A는 지난 주말 여성 후배인 C와 골프 회동이 있었는데 C가 그 모임의 멤버 중 최상위 권력자에게 하는 모습을 보니 B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니 오히려 B보다 더 헤퍼 보였다고 합니다.


나야 워낙 태생이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 인간이라 타고난 기질대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차갑고 무뚝뚝함이 흠뻑 묻어나는 나의 일관적인 태도가 A에게는 일반적인 여성 직장인의 모습처럼 각인되었나 봅니다. 교태, 아첨은 불구하고 친근함, 살가움도 기대하기 어려운 나에게 익숙해지다 보니 상위 권력자들에게 보이는 여자들의 살가움이 A에게는 헤프다는 부정적 모습으로 읽혔던 것입니다. A가 B를 인간적으로 애정함을 알고 있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B의 살짝 넘치는 살가움에 질투가 섞여 불편했던 듯도 합니다.

 

사실 나에게 B의 '살가움'은 내가 갖지 못한 결핍된 능력으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A에게는 여자의 '헤픔'으로 다가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음이 씁쓸하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23P -
 '도'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 25P -


저녁에 읽은 '도덕경 2장'이 절묘하게도 오전 사건과 얽혀 읽힙니다.

‘그러함’으로 바라보고 인정해야 하는데 분별적 사고가 비집고 들어오니 나에게 ‘살가움’으로 읽혔던 아름다움이  A에게는 ‘헤픔’이라는 추함으로 읽힌 것이지요.


성인[자유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 23P -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인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26P -


나도 모르게 같은 여자로서 B의 입장을 대변 합니다.

“B를 비난할 것 없어요. 워낙 그런 기질의 분이고 그런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그러한 기질이 삶에서 실(失)보다는 득(得)을 더 많이 안겨주어 자연스레 그런 행동들이 강화됐을 수도 있죠.

물론 어떤 의도나 목적성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다면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작위적 의도가 없었다면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면 돼요. 애정이라는 미명 하에 평가하거나 바꾸려 하지 마요.”  


이번 장을 통하여 기질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행동 양상으로 비춰줬던 나의 시선과 '인정욕'이 발현된 위선된 행동으로 치부해버린 A의 시선이 충돌되는 순간을 잡아봅니다. 동일한 태도와 행동에서 파생된 한 끗 차이의 시선은 호의와 불의라는 극명한 판단의 괴리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평가와 판단이 들어가는 순간 반대급부가 자연스레 탄생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이해됩니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야 행위가 지극히 자연스러워 분별적 사고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범인(凡人)으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들에게 무위(無爲)를 실천할 내공을 쌓기에 삶은 너무 숨 가쁘게 바쁩니다. 이원론적 사고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상호 관계 속에서의 평가 지양, 판단 보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TV 방송에서 한 연예인의 이야기가 가슴에 꽂힌 적인 있습니다.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찾는데 도움을 받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지'와 '그러라 그래'입니다. 나 또한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어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를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써먹고 있습니다. 나름 효과가 훌륭합니다.

상호 관계 속에서의 평가 지양, 판단 보류가 어렵다면 최소한 '그럴 수 있지'를 주문처럼 외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싶습니다.  


'도道'에 다가감은 어줍지 않은 판단에서 시작되는 억지스러운 삶을 지양하고 본연의 자연스러움이 삶에 묻어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피는 노력에서 시작됨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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