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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an 05. 2020

1월 4일 일기

10살 고양이 사랑이의 근황

부모님 댁에서 데려온 사랑이(10세, 고양이)는 집에 잘 적응 중이다.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신호가 여러 개 있다. 


사랑이는 끽해야 옷방이나 부엌 정도를 왔다 갔다 했고, 침실이나 베란다 쪽은 쳐다볼 생각도 안 했었다. 또 잠을 자는 공간은 옷방의 선반 맨 아래였고 주로 거기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옷방이 사랑이의 프라이빗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부터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으니, 바로 자는 공간을 바꾼 것이다. 2주 만에! 침대까지 올라올 생각은 없는 듯 보이지만, 여하튼 어제는 내가 자는 침대 바로 앞에서 잠을 잤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고양이가 잠자는 장소를 옮겼다는 것은 (그것도 내가 자는 곳 근처로) 집사 입장에서는 꽤 상징적이며 의미가 크다. 언젠가는 쓰겠지 하고 침실에 스크래쳐 겸 앉을 공간을 마련해줬었다. 캣닢도 뿌려주고 적당히 고립되도록 세팅해주니 간간히 와서 좀 앉아있다 다시 휙 옷방으로 가버리곤 했었는데, 이 곳에서 밤새 잠까지 잘 줄은 몰랐다. 


오늘 아침에 내가 부스스하게 깨서는 "사랑짱~~~ 어딨나 사랑짱~~" 하고 질척이며 사랑이를 찾았는데 (물론 아무리 불러도 간식 줄 때 말고는 반응 안 함. 하지만 혼자 계속 부름) 스크래쳐 위를 보니 사랑이도 같이 자고 있던 것이었다. 정말 기뻤다. 그리고 내가 "어이구 사랑짱 여기서 잤어~~~~? 언니랑 같은 방에서 잔 거야~~~?"하고 또 오바스럽게 떠들었더니 띵띵 부은 얼굴로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라. 그래 그 정도면 대답해준 거지.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사랑짱은 내가 앉아있는 소파 옆에 엎드려 식빵을 굽고 있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마음을 열어준 사랑이가 너무 고맙다. 


또 다른 신호는 바깥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베란다 쪽에 잘 안 오던 분이셨는데, 언젠가부터 창문 바로 앞에 앉아 흡사 면벽수행을 하듯 가만히 앉아 있길래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 줬더니 조심스레 베란다로 나가서 바깥을 한참 동안 내다보고 있더라. 그래서 아예 베란다 샷시까지 다 열어줬더니 나무, 자동차, 사람들, 가로등 같은 풍경들이 흥미로운지 머리를 쭉 빼고는 재미있게 구경하더라. 그래서 이제 베란다도 자주 드나들고, 어쩌다 내가 창문을 안 열어주면 "웨여엉~~?" 소리를 내며 집사의 눈치 없음을 꾸짖기도 한다. 그러면 난 달려가서 안쪽 창문 두 개와 바깥 샷시를 모두 활짝 열어준다.


이제 사랑이는 나와 같은 방에서 잠도 자고, 베란다에도 드나든다. 집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필요한 게 있으면 요구도 하고.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도 파악이 된 모양이다. 가끔 날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가 있는데, 그건 자기 몸을 쓰다듬어 달라는 신호다. 이렇게 우리 만의 언어가 생겼고, 더 생길 것이고, 사랑이(예민한 고양이, 10세)를 강제 이주시킨 집사는 보름이 지나서야 한 풀 마음이 놓였다는 소식이다. 사랑아 건강하게 오래 살자. 언니가 더 좋은 집사가 되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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