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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r 16. 2020

존재함을 즐기기

매일 연습해보겠습니다

  2020년 3월 16일 저녁 7시 58분. 이 글은 집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안에서 쓰고 있다. 퇴근시간대라 한창 붐비어야 할 열차가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많아서인지 텅텅 비어있다. 한 벤치에 2-3명이 거리를 두고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지하철을 타기 전, 친구 A와 안국동에 있는 전통찻집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찻잔에 홀짝홀짝 용정차를 따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아래와 같은 심오한 대화를 나누었다.

"너 그런 적 있어? 존재 자체를 즐겼던 적." 내가 친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묻자, 그는 내가 무슨 종교라도 전도하는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야? 존재를 즐긴다니. 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도 있어?"

"아니, 요즘 가만히 보니까 내 상태가 온전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는 거 같은 거야. 그러니까 항상 이런 식인 거야. 과하게 각성된 채로 무언가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밥을 허겁지겁 먹고 있거나, 그렇게 먹고 난 후 졸고 있거나,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는 중이거나, 자려고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는 중인 거지."

"맞아. 그건 나도 그래. 거기다 스마트폰 보면서 멍 때리는 것도 추가되야지."

"그러니까.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면 한 달이 지나있고 1년이 지나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래. 밥은 왜 갈수록 빨리 먹게 되는지 모르겠어. 또 먹고 나면 그렇게 졸리다?"

"진짜 먹고 눕는 게 세상 최고 행복하더라. 밥은 그냥 네 성격이 급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여하튼 또렷하고 맑은 정신으로, 커피 같은 각성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편안하고 깊게 호흡하며, 그저 존재함 자체를 즐기고 싶어. 그래서 아무래도 명상을 매일 자기 전에 잠깐씩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

"명상이 진짜 좋다더라. 서점 가니까 명상책 같은 것도 많고."

"존재로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내가 해보고 좋으면 너한테도 알려줄게."


   확실히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게 하나의 챌린지가 될 정도로 과도한 자극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돈, 일자리, 노후, 부동산, 관계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부분부터 막연한 불안까지 갈팡질팡한다. 나도 물론 그렇게 살고 있고, 언제까지 이 피로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잠도 잘 자려고 하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고 음식도 되도록 건강하게 먹으려 한다. 하지만 가끔씩 이걸로도 부족하다 느낀다. 홍삼도 챙겨 먹어야 할 것 같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은 끝도 없이 늘어나고 당장 뭐라도 안 하면 미래에 아주 불행한 일이 닥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강박들이 나를 나아가게 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번아웃도 여러 차례 겪었고, 피로와 생의 환멸까지 들 때도 있다. 

 

 앞으로는 그저 존재함을 즐기고 느끼고 싶다. 매일 마스크를 차고 다니면서 내 숨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하게 되었다. 나도 한 마리의 생명체구나, 짐승이구나, 고양이 또는 개들처럼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구나, 라는 것을 더욱 깊이 느끼고 즐기고 싶다. 


내 지능과 외모 부모와 소속된 정부와 국가 모두 내가 선택하고 고른 것들이 아니다. 인생은 많은 경우 우연에 지배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은 나의 소관이 아닌 것이다. 안되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이제 내가 살던 방식에서 조금씩 변화를 도모할 것이다. 쾌락과 향유에 더 민감하게, 나 자신이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볼 것이다. 물론 또 어느 날에는 멍하니 트위터를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날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든 점차 그냥 존재함을 즐기는 순간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보겠다. 아니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말자. 그냥 숨이나 쉬자. 가능하다면 느리고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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