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Oct 12. 2020

남해의 공기는 1/3

부드럽고 따뜻했다

 애인의 부모님을 만나러 남해로 갔다. 부산은 여러 번 가봤지만 전라남도 땅끝으로 간 건 처음이었다. 직통 노선이 없어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기도 하였다. 고속열차는 흥미롭고 영감을 주는 공간이라 몇 시간의 여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기차는 비행기와 닮은 구석이 많다.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이 객실을 드나드는 풍경, 좌석의 모양과 배치, 앞자리의 간이 식탁을 뽑아서 쓰는 것, 작고 좁은 화장실,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등. 좌석에 등을 기대고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비행기를 타고 낯선 이국으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빽빽한 논들을 보자니 영혼까지 풍성해졌다. 멀찌감치 이름 모를 산들이 구비구비 능선을 병풍처럼 둘러놓았다. 창문 밖의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기차는 계속 남쪽을 향해 달렸다. 그동안 애쓰며 살았던 날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내 앞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옆 좌석의 애인은 노트북을 켜고 일을 했지만 나는 한껏 나와 기차와 창밖 풍경의 로맨스에 잠겨있었다.


 아주 가끔씩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었고, 그때마다 난 혼자였다. 홀로여서 외로웠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자리와 장소마다 홀로였다. 일도 혼자 했고, 밥도 혼자 먹었고, 집에서 잠을 자거나 멍하니 쉬고 있을 때도 혼자였다. 비틀거렸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과는 달리, 1인분의 삶에서 제법 밸런스를 잡으며 안정을 찾게 된 것이 최근 1-2년 사이의 일이다.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났고, 연애를 하고, 쪼금 길게 하다가, 서로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애인과 나 두 명이 구축했던 세계였는데,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세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빅뱅과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의 빅뱅은 비교적 조용했으나 내적으로 요동치는 에너지와 떨림은 컸다. 분명히 우리 둘의 이야기였는데, 이제 최소 5명 이상이 이 스토리에 추가 인물로 들어왔다. 또 몇 명이 더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바퀴는 이제 구르기 시작했고, 당분간 이 바퀴가 멈출 일은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나와 너 또는 주로 나만이 감독 겸 배우로 있던 이야기였다. 이제는 투자도 받고 배우들이 더 고용되어 규모가 큰 영화가 되었다. 스토리는 어떤 식으로든 더 다이내믹하고 복잡하고 흥미롭겠지.


 이런 두려움과 떨림을 안고 남해 어느 소도시 역에 도착해 하차를 했다. 멀리서 애인의 아버지가 웃고 계셨다. 그 역시도 작게 떨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빅뱅을 경험하고 있었다. 애인의 고향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살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여기저기서 내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기존의 역학관계는 수정될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와 행성, 별들이 탄생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각본을 여러번 고쳐쓸 것이다. 모두가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 직감할 수 있었다. (1편 끝)

  

  

작가의 이전글 SNS 계정을 다 삭제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