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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an 29. 2021

퇴사병에 먹히는 게 있나요

퇴사병에 걸렸다.

정작 사직서를 낼 배짱도, 퇴사 이후의 삶에 대한 대책도 없으나 그래도 더 이상 일하기 싫다.

관성 때문에 출근은 한다. 지각하지 않을 만큼만, 위에서 말 나오지 않을 정도의 일을 겨우 한다.

마음은 이유 없이 분주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게 몇 주, 몇 달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게 퇴직이었다면 이렇게 혼자 궁시렁거리고 있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성격에 확신이 들면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밀어붙이고도 남았을 테지.

하지만 이상해. 일은 하기 싫고 출근도 싫은데, 또 관두는 건 못하겠어.

우울하다.


하여, 내가 잘하는 "전문가에게 도움받기" 전략을 써보았다.

나는 심리상담, 정신건강의학과, 사주를 다 이용한다. 가끔씩 꾸준히 간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상황에 대한 객관적 조망이 필요할 때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친구에게 토로하는 것보다 시원하게 돈 쓰고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게 낫다. 그런데, 더 이상 상담도 정신과도 사주도 안 먹힌다.

갇혔다. 그냥 이도 저도 못하고 울상만 하고 있다. 하아. 어쩌지.


상담 선생님은 내 인정 욕구에 대해 지적하셨고, 최근 일을 통해 내가 인정을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겠냐 하셨다. 정신과 선생님은 늘 그렇듯이 나 같은 증상에 효과가 있을 법한 약을 추천해주셨다. 사주에서는 내가 원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그렇다고 한다.


하....

예....

다 맞는 말씀이고요.... 저도 공감합니다만.....

그래도 일은 여전히 하기 싫다. 그동안 잘 먹혔던 방법들이 이제 씨알도 안 먹힌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는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전직 후, 현재 본업을 시작하고 나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힘들지만 보람찬 순간이 더 많았고

그래서 몇 년 동안 버텼는데, 이젠 의미도 뭣도 없고 그냥 출근하기 싫다. 출근하러 와서도 일하기 싫다. 집에서 그냥 멍하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다 목적지 없이 걷다가 내키면 멀리 까지 나가서 나들이도 하고 싶다.

6시에 퇴근하는 애인 회사 앞으로 가서 같이 손잡고 집에 들어오고 싶고 오랫동안 반신욕을 하고 싶다. 좀 걷고, 멍하니 있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즈음 집으로 와서 콩나물국에 잡곡밥 말아서 김치 얹어 먹고 싶다. 마음의 허기가 깊다. 허기를 채우고 싶다. 퇴사가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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