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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스두어 Feb 18. 2017

샌프란시스코 초상화가 이그나시오

내안의 아티스트 발굴 프로젝트. 평생 첫 목탄 초상화를 그리다.

샌프란시스코 미션지구 아트 스튜디오 '루트 디비전'. 흑백 벽화가 인상적인 건물의 초인종을 누르자 물감 묻은 작업복을 허리에 두른 화가 이그나시오가 맞이한다. 에어비앤비 '트립'을 통해 목탄 초상화를 그리는 경험을 신청했다.

예술 감각이 뛰어난 샌프란시스코 토박이 건축가 레베카와 마크 커플. 선도 제대로 그릴 줄 모르는 싱가포르 여행자 하나와 서울에서 온 여행자, 페루 출신 신진 화가. 서로 다른 배경과 그림실력을 가진 다섯명의 조합. 이그나시오가 어떻게 반나절 동안 이 그룹을 이끌고 작품을 만들어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모두 이젤 앞에 앉자 이그나시오가 목탄 초상화를 보여준다. 지독히 어둡고 남성적 이미지의 그림은 초보자.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낸 강렬한 눈매의 흑인 여성은 중급자. 우수에 젖은 가냘픈 인상의 여인은 상급자용. 학교에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이론 수업이 먼저 끝나야 연필을 들 수 있었다. 배운대로 정확한 황금비율을 따르려다 보니 선하나 그리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그나시오의 손길은 거침이 없다. 구두약 같은 통에 납작한 나이프를 ‘툭툭’ 누르더니 캔버스에 ‘슥슥슥’. 목탄을 캔버스에 부드럽게 문지르며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다. 연필을 눈 높이로 들어올려 각도를 잡고 신중하게 한 선 한 선 그려나가는 상상속 화가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이그나시오는 버터나이프 같은 모양의 도구를 주로 사용한다. 어느날 아내가 화장하는 모습을 보다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곱게 펴바르는 넓고 부드러운 스펀지가 달린 메이크업 도구를 발견하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

목탄화는 날카로운 선이 아닌 부드러운 면으로 시작한다. 선은 수정이 어려운데 면은 손가락이나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고 덧입히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원하는 윤곽을 잡아간다. 그래서 초보자도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다. 먹의 농도로 명암과 입체감을 표현하는 수묵화를 닮았다. 눈동자와 콧날같은 하이라이트는 주변을 어둡게 칠하고 지우개로 지워낸다. 백발을 한올 한올 표현할 때면 흰펜으로 날렵하게 그려낸다. 목탄화 기법들을 실연과 함께 설명하는 이그나시오. 경탄의 눈빛을 보내던 여행자들도 이젤 앞에서 3시간 동안 목탄화를 그려내려간다. 이그나시오가 돌아다니며 원포인트 레슨과 독려를 하자, 모두가 정말 아티스트가 된 듯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이그나시오의 긍정성이 우리를 아티스트로 만든다. 놀라운 능력이다.



매력적인 화가 이그나시오. 페루에서 자란 그는 어떻게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됐을까? 메이크업 도구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내 자랑이 끊이지 않는 이그나시오는 천상 예술가이자 운명적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화가를 꿈꾸던 고등학생. 1년간 교환학생으로 찾은 호주에서 그의 마음을 훔친 한살 어린 호주 소녀를 만났다. 사랑의 힘은 그를 졸업 후 호주로 이끌어 사랑하는 소녀와 15년을 살게 한다. 결혼 후 사랑하는 2살 아들 루카스와 함께 아내의 첫 해외 근무지인 샌프란스코에 둥지를 튼 게 바로 작년. 오자마자 신진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루트 디비전에 운 좋게 선발되었다. 레지던트 아티스트 자격으로 루트 디비전에 작업 스튜디오를 두고, 마음껏 작업과 전시도 하게 됐다. 대신 독특한 체험여행을 제공하는 에어비앤비 ‘트립' 서비스를 통해 여행자들에게 목탄 초상화 수업을 제공하는 재능기부를 한다. 몇 년 후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룬 것을 다 내려놓고, 아내의 부임지에 따라 다른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 그렇지만 변화가 두렵지 않다. 아티스트로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림과 아내, 가족이 있는 삶이다. 행복의 원천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다.

그가 들려주는 러브스토리가 끝날 무렵, 모두가 멋진 초상화를 그려냈다. 나도 목탄과 펜, 메이크업 브러시, 휴지를 이용해서 몇 시간에 걸쳐 하얀 캔버스에 강력한 남성미를 풍기는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모두 스스로의 작품의 결과에 놀라워 했다. 루트 디비전 갤러리 한 편에 완성한 초상화를 내려놓고 사진을 찍으니,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화랑에서 데뷔 전시를 한 작가라도 된 듯 뿌듯하다.


우리만의 전시를 마치고 와인과 치즈를 마시면서 다들 즐거웠던 오늘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그나시오가 본인 작업스튜디오 뿐 아니라 루트디비전의 다른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실도 안내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꽉찬 샌프란시스코의 아트 트래블 경험이었다. 이제 그 추억을 서울의 내 침실로 고스란히 가져올 생각이다. 내 첫 목탄 작품을 검정색 프레임에 담아 한쪽 벽면에 비스듬히 세우고,  때때로 내 안의 아티스트를 만나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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