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에서 쓰는 사람으로 전환할 때 필요한 것
쓰는 일은 때때로 '생활 속의 내'가 새로운 공간으로 작은 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 공간은 생활과 세계가 관념과 상징으로 전환되어 떠다니는 우주 같은 공간이다. 쓴다는 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지상의 무게를 반납하고 유영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방금 전까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거나 연체된 공과금을 납부하는 생활인이었다가, 쓰는 사람이 되려면 작은 전환 스위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난 때때로 글 쓰는 공간을 바꿔주는 걸로 그 스위치를 전환하곤 했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땐 아이의 재우다가 아이가 잠들면 아이 옆에 작은 상을 펴고 노트북을 올려놓곤 글을 쓰곤 했다. 아이의 숨소리가 떠다니던 깜깜한 작은 방이 그 시기엔 새로운 글쓰기 공간이었다. 그때 아이의 숨소리 사이에서 많은 글이 태어났고, 그 글들은 내 첫 책의 모종이 되었다. 아이가 잠든 어두운 방이 글의 모판이었던 셈이다.
그 한 시기가 지나자, 도서관이 내 새로운 전환 스위치가 되었다.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틈이 날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갔고 그 공간은 아무런 제지 없이 날 받아주었다. 도서관에서의 환상적인 시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SNS에 실었던 잡문이나 에세이, 신문 지면에 실었던 칼럼들이 도서관의 백색 소음 사이에서 탄생했고, 노트북 어느 폴더에서 긴 방학을 보내고 있는 동화와 소설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생활인에서 쓰는 사람으로 전환할 때 스위치가 되어 주었던 도서관에서의 한 시기도 이제 잠정적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생활은 내 삶을 크게 뒤흔들었다. 도서관을 대신해서 카페에 드나들기도 했지만 도서관만큼 부담 없이, 빈번하게 가진 못했다. 손가락 힘이 많이 드는 빡빡한 스위치랄까.
현저히 떨어진 글 생산성에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다가 궁여지책으로 집안의 공간에 작은 전환 스위치를 몇 개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잠든 밤에, 애들 방을 읽고 쓰는데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홈플에 장 보러 갔다가 단돈 19900원에 파는 사이드 테이블을 발견하고 냉큼 사 왔다.
사이드 테이블과 내 방에 있던 스탠드 조명을 애들 방에 옮겨와 세팅하니까 그럴듯한 공간이 되었다. 아직 좋은 '전환 스위치'가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19의 시대는 각자가 나름의 자구책을 고민하는 시기가 아닌가. 모두가 뉴 노멀을 예측하고 대비하려고 한다. 나처럼 엄밀하지 못한 인간은 모두가 하는 그 몸부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이방에 덩그러니 놓인 사이드 테이블은, 일상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 증거로 훗날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꽤 오랜만에, 잠든 아이 옆에서 쓰고 있다. 널어야 하는 빨랫감을 옆에 쌓아두니 글이 갑자기 잘 써진다. 빨래에 전환 스위치를 달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