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는데?’라는 말을 단지 그 글이 초보적이어서 진입 장벽이 낮다고 여긴다는 뜻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중심으로, 좋은 글은 어떤 것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답안을 작성해 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의미; 이해하기 쉬운 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미는, 이해하기 쉬운 글이라는 뜻이다. 일상에서 쓰는 말을 사용하고, 문장이나 문단의 얼개가 복잡하지 않으며, 표현이 적확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쉽게 쓰는 게 미덕이다. 우리가 고전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다른 시대에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와 문화에서 사용하던 표현과, 글의 구조와, 문장의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던 시대에선 그 말뜻을 따로 해석할 필요도, 익숙해지고자 하는 노력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분명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쓴 글인데 어떤 글은 바로 이해할 수 없을까. 물론 내용 자체가 어려운 글이 있다. 난해한 이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두세 번 읽어야 하는 수고를 주는 이유가 뭘까.
사실은, 쓰는 나도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잘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은, 가르치는 행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이 어떤 지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쉽게 가르칠 수 없다. 지식의 핵심에 도달한 사람은 산 위에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러 과정을 한눈에 파악한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사람이 중간에 맞닥뜨리게 될 난관이나 장애도 미리 알고 지도할 수 있다. 어떤 구간에서 지름길이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으므로,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겪게 될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정확히 길을 모르는 사람은, 제자와 이런 말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 바위를 돌아가면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는 말인지요?”
“음, 정확히 바위 뒤에 있다는 말은 아니고, 바위가 있는 공터를 발견하면 정상으로 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럼 바위가 있는 공터를 먼저 찾아야 하겠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돌이 바위라고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정의 내리긴 힘들겠군. 바위의 기준이 0.5톤 이상의 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야, 그 돌을 바위라고 ‘간주’할 순 있겠네만.”
“네. 그럼 제가 정상에 가기 위해선, 바위의 기준이 0.5톤 이상의 돌이라고 할 때, ‘바위’라고 ‘간주’할 수 있는 돌이 있는 공터를 먼저 발견한다면, 정확히 바위 뒤쪽에 길이 난 것은 아니지만 공터 어딘가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길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꼭 정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네. 그곳에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 (시바, 정상 안 가.)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나의 내밀한 어떤 것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소재가 일상이든, 이론이든, 생각이나 느낌이든, 그 재료들은 글 쓰는 이의 내면에 한 번 들어가서 조리되는 과정을 거친다.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읽는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그려야 하고, 직접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고 듣는 것들을 통해 내가 추출한 성찰이, 유리창에 착 달라붙은 도롱뇽처럼 읽는 이의 마음에 달라붙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내 글이, 나의 안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고려하면서 글과 문장을 다듬어야 한다.
자신이 온전히 소화시키지 못한 지식이나 성찰을 글로 풀어낼 때 그 글은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글을 쉽게 쓰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다. 쓰는 이가 헷갈리면 읽는 이도 이 글이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리게 된다. 미로 정원이 아닌데, 정원을 미로로 만들면 곤란하다.
물론, 글에 따라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미로 정원을 계획하고 만든 경우다. 그럴 때도 잘 쓴 글은, 아 이것은 글쓴이가 읽는 이의 다양한 생각을 유도하기 위해 공간을 열어두었구나, 하는 걸 명확히 알도록 해준다.
자, 알아맞혀봐. 감정의 맛만 보라고!
의도적으로 핵심을 빼놓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있다. 옛 싸이월드의 다이어리 게시판에서 흔히 보던 글이다.
“아프지만, 일어서야겠지.
상처라는 건 하루아침에 치유되지 않겠지만,
복분자 알코올 정도면 소독이 될까.”
“흘린 눈물을 모으면 한 스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렇게 해맑게 웃는 내가 위선적이기도 해.
저녁에 켠 촛불이 흔들린다. 내 마음도 흔들린다.”
다이어리에서 자주 목격되곤 하던 글을 재현해본 것이다. 사실 내 손을 거쳐서 윤색되어서 그렇지, 이것보다 훨씬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단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을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화자가 아프지만 무엇 때문에 아픈지는 끝끝내 알지 못한다.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맥락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수수께끼 같은 글이다. 다이어리를 ‘공개’로 해놓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나의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텐데, 감정만 배설하고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그 정도의 글만 보고도 다이어리의 주인에게 일어난 일을 아는 것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는 사실이다. 댓글을 보면, 글 쓴 사람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 사정을 아는 것 같진 않다.
“OO 씨의 감성이 오늘 저를 적시네요. 저도 마침 냉장고에 있던 복분자를 꺼냅니다.”
“흔들리는 마음에는 새로운 테이프가 필요합니다. 가까이 계신 분이라면, 발라드리고 싶네요.”
대체, 다이어리를 쓴 사람이나 이런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나만 모르는 감성의 비밀 코드가 있는 것일까. 이를 테면, ‘상처’와 ‘복분자’가 나오면, 동네 개한테 발뒤꿈치를 물린 사연이고, ‘위선’과 ‘촛불’이 함께 나오면, 자주 정전 사태가 일어나는 마을에 사는 소녀의 이야기라든가, 하는.
어쩌면, 쓸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맥락이 없는 ‘슬픔’과 ‘우울’일지도. 그렇다면 이 다이어리의 주인들은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는 슬픔과 맥락 없는 우울을 그대로 썼을 뿐인데 이렇게 지적질을 당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발 맥락을 밝혀주길 바란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내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를 나도 좀 알고 싶다고!
아름다운 문장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는 것은, 문학적인 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름다운 문장은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시적인 문장은 해석하기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착각을 한다.
“문장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일정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어떤 걸 지불해야 하죠?”
“글의 ‘이해도’ 요.”
“문장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문장이 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세상 어떤 것도 아름다운 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누구라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어야 존경을 받지요. 존경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이해도’는 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값을 치르는 동전이 아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문장들을 보자. 주로 잘 알려진 소설들의 첫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이해도’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장 그 어디에도 덕지덕지 붙은 미사여구를 발견할 수 없다. (‘시’는 논외로 한다. 시는 그 자체가 함축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문장에 담아내는 미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 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김훈, <칼의 노래>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위에 인용된 문장들은 모두 일상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시적인 문장이라고 평가받는 <칼의 노래>의 첫 문장조차도 일상의 언어로 빼곡히 채워졌다. 좋은 글을 쓰는 일은, 내 글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헌법의 풍경>, <불편해도 괜찮아> 등의 사회학 대중서를 쓴 법학자 김두식은 글쓰기의 지론을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한다.
“고통스럽게 쓰되, 쉽게 읽혀야 한다.”
고뇌와 상념 속에 떠도는 추상적인 생각을 전달하더라도, 쉽게 읽혀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쓰는 사람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두 번째 의미; 매력적인 글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말에 숨은 두 번째 의미를 알아보겠다. ‘나도 쓸 수 있겠다’고 되뇌는 말 이면엔 ‘매력적이어서 쓸 가치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말엔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기만 한 초등학생의 글을 보고,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 고 읊조리진 않는다. 그런 말은, 보통 괜찮은 글을 발견했을 때, 혹은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작가가 쓴 글을 보면서 하는 생각이다.
쓰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글에는 또 어떤 요소가 있는 것일까.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는 제각기 다르다. 이 부분을 말할 때는 앞의 '이해하기 쉬운 글'에 비해 더 주관적으로 글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내가 끌리는 글은 내용면에선, 삶에 뿌리를 둔 '서사'와 '생각'이 적절히 어우러진 글이다. 지나치게 사변적이거나 '나는 오늘 뭘 했다'는 얘기만 늘어놓는 글은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형식 면에선, 논리와 비유를 자유롭게 오가는 문장을 좋아한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내 마음을 그렇게 잡아끄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하루키의 문장은 단단할 뿐 아니라, 논리와 비유를 자유롭게 오간다. 그의 글은 쉽게 이해되면서도 매력적이다. 일상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거기에 의미를 담는다. 쉽기만 하거나, 문장만 매력적이라면 내겐 반쪽짜리로 느껴진다. 어쩌다 내용과 형식 모두가 매력적인 책을 발견하면 난 "심봤다!"를 외친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단골이 되어준다면 경영은 이루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경영자는 명확한 자세와 철학 같은 것을 기치로 내걸고, 그것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비바람을 견디며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가게를 경영하면서 내가 몸소 체득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작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 하루키, 좋다. 의미와 형식 모두가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난 어떤 소설을 보면서도, ‘(아, 좋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진 적이 있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말은 그 글을 얕잡아 보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내게 그런 희망을 주었던 작가는,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다. 대표작은 단편소설집 <대성당>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의 단편들은 일상의 흐름을 담담히 표현하면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스펙터클한 스토리 없이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이런 평이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어찌나 평범한 문장들로 이루어졌던지, 단편 소설 하나를 읽고 보통 기억에 남는 문장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카버의 단편들은 기억나는 문장들이 없었다. 다만, 문장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내는 일상적 이야기에 깊은 공감과 먹먹함만 남았다.
처음부터 논리와 비유를 넘나들고, 일상과 의미를 잘 배합하는 매력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문장의 기본이 갖추어질 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매력적인 문장으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단단한 문장'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다.
평이한 문장/ 미문/ 단단한 문장
우리는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써야 하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평이한 문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단단한 문장’을 써야 한다. 홀로 따로 떼놓고 볼 때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 쉬운 문장들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평이한 문장’과 ‘단단한 문장’으로 구분해본다. ‘평이한 문장’은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문장이고, ‘단단한 문장’은 어느 정도 글쓰기 훈련이 된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라고 정리해본다.
<부연>
1) 문장 속의 호응 관계가 맞지 않거나 문법이 틀린, 오문 내지 비문은 논외로 한다. 이 글에서 얘기하는 평이한 문장과 단단한 문장은 둘 다 기본적인 문법과 호응 관계를 잘 지킨 문장들이라고 전제한다.
2) ‘글쓰기 훈련이 된 사람’에 대해 글쓰기 정규 과정을 거쳤거나 어떤 형태의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많이 써 본 사람을 일컫는다.
평이한 문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개성을 드러내거나 울림을 주기엔 역부족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일상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고 하자. 사용된 문장은 비문도 오문도 아니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글에 매력이 없다. 평이한 문장은 쉽게 읽히지만, 다른 문장들과의 연결이 헐겁다. 언제 튕겨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단단한 문장이라고 하면 흔히 개인기가 뛰어난 축구 선수 같은 문장을 떠올린다. 그 문장 하나만 떼어놓고 봤을 때, ‘그뤠잇!’이라고 외칠 수 있는 비범한 문장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범한 문장들뿐만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문장도 얼마든지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글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단단한 문장은 화려하진 않지만 주변의 다른 문장들과 톱니바퀴처럼 조응한다. 혼자 떼어놓고 봤을 때는 알 수 없던 ‘단단함’이 다른 문장들을 서로 떠받들고 지지하면서 드러난다. 그 자리에 그 문장 말고 다른 문장을 쓰면 맛이 살지 않을 것 같다. 글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데 모자람이 없을뿐더러, 매력적이기 때문에 흡인력도 갖는다. 영양과 맛을 모두 잡은 요리 같다고나 할까.
평이한 문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시도로 인해 글 쓰는 사람은 때때로, ‘미문(美文)’에 도달하게 된다. 수식어가 많고 도드라지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 문장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실제로 글 속에서 글을 돋보이게 하는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미문은 글 전체를 잡아먹는다.
수식어와 번지르르한 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미문은 멋지고 어떤 옷에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벨트와 같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문장이라도, 글 전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 곤란하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훼방을 놓는 문장은,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붙어 있더라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옳다. 화려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장이 글 전체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화려한 문장은, 미문(美文)이라는 평가 이상을 받긴 어려운 것이다.
문장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야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있어서, 내 눈에 좋은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평이한 문장’이고, 이것은 ‘단단한 문장’이다! 고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그래서 문장을 수준에 따라 나누어보려는 시도는, ‘무딘 회칼로 오징어 회를 뜨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다만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사람이라면, 어떤 글들을 읽을 때, 음, 이 글은 단단하군, 이 글은 좀 헐거운데? 정도의 느낌은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은, 곧 문장이나 글의 수준을 드러내는 일정한 기준이란 게 존재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 글의 시작점이 된 경구로 다시 돌아가 보자.
“좋은 글은, 누군가가 봤을 때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글이다.”
이 경구는, '이해하기 쉬운 글'과 '매력적인 글'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풀어볼 수 있다는 얘기를 지금까지 했다. 좋은 글에 대해 내가 쓴 은유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음 요리는 5성급 호텔의 수석 주방장이 캐비어를 재료로 만든 요리입니다. 하나에 금테를 두르는데 2돈 이상의 금이 들어간 화려한 접시에 플레이팅 했습니다.”
“(음식을 먹은 후) 아, 역시 멋지군요. 훌륭한 요리입니다. 맛도 좋고 보기도 좋습니다.”
“다음 요리는 이름난 셰프는 아니지만, 생선 요리로 잔뼈가 굵은 요리사의 요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등어가 주재료입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흰색 사기 접시에 플레이팅 했습니다.” “(음식을 먹은 후) 아, 이거 정말 고등어로 요리한 게 맞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맛이군요. 이 요리를 우리 집에서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후자가 좋은 글에 대한 내 느낌이다. 전자와 후자의 상황 중에 음식을 먹은 사람이 어느 쪽에 더 감명을 받고 흥분하고 있는지 느껴지시는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고등어로만 요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선입견과 달리, 평범하고 쉬워 보이는 문장으로 쓴 글도 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훌륭한 요리사의 요리를 내 주방에서 재탄생시키고 싶다는 평가는, 그 요리를 얕잡아 보는 말이 아니라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