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죽음으로부터 뻗어간 단상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을 읽고

by 송광용

1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은, <섬>과 <일상적인 삶>에 이어 세 번째로 접했던 그의 산문이다. 카뮈의 철학 교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문장가이다. 난 이십 대 초반에 접했던 <섬>을 읽고 담담하고 철학적인 그의 문장에 반해버렸다. <섬>에 실린 '空(공)의 매혹'이라는 작품을 읽고서, 그 말의 실체를 정확히 인지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空의 매혹'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너무 좋아서 공책 여기저기에 수시로 끄적이곤 했다. '고양이 물루'라는 글을 읽고는, 언젠가 썼던 짧은 동화의 고양이 주인공에게 '물루'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처럼 그의 책은, 길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어느 개의 죽음>은 장 그르니에의 표현대로,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개의 죽음과 그에 따른 성찰과 애도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장 그르니에는 단순히 개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개'의 단순성을 말하며 인간의 위선을 꼬집는다. 보편적 '죽음'도 말한다. 이 죽음에의 성찰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지고, 노년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를 성찰하는 일로도 확장된다. 그리고 논리와 철학으로 가득 찬 자신을 일으켜 세워 기어이 산책을 나서게 만들었던 개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드러낸다. 주워 기르던 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 생각은, 동물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로 뻗어나간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든 건, 순전히 우연이다. 앞서 소개한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 필적할 만한 분량 적은 책을 책장에서 찾다가 발견한 책이 바로 <어느 개의 죽음>이다. 묘하게도 이 두 책 모두 제목에 동물을 내세우고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순전히 짧다는 이유로, 저녁 두어 시간이면 부담 없이 다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밀도 높은 단상들은 책장을 넘기려는 내 손가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수시로 멈춰서 글귀를 메모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짧은 책이었지만, 가장 많은 문장을 옮겨 적은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에 표지도 바뀐 개정판이 나온 걸로 아는데, 내가 가진 책은 2004년에 나온 1판 8쇄 본이다. 난 개정판보다 구판의 표지와 판형을 한 8배쯤은 더 좋아한다. 미니멀한 디자인은 그야말로 그르니에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표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은 여백이고 그 여백은 역설적으로 장 그르니에 책들의 문학적 권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하지만 출판사의 생각은 좀 달랐다. 1997년에 초판으로 나온 이 책이, 새로운 책으로 보이길 바랐던 것 같다. 미니멀하고 특별했던 표지는 요즘 나오는 평범한 에세이 표지처럼 바뀌고 말았다. 출판사가 들인 돈과 노력이 안타깝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니, 달리 생각할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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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책을 읽으면서, 내 곁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버린 개 한 마리를 떠올렸다. 난 그 개를 생각하느라, 책을 잠시 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흔하디 흔한 빙고라는 이름의 개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명절에 받은 용돈을 들고 시장에 갔다가, 어떤 할머니가 박스에 놓고 파는 강아지 한 마리를 8천 원을 주고 사 왔었다. 개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뜨거웠고, 엄마에게 키우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하겠노라고 공언했지만 이내 개를 키우는 책임은 어머니에게 넘어갔다. 내가 한 일이라곤, 안고 쓰다듬고 옥상에서 함께 뛰어다니는 것뿐이었다.

빙고와 우리는 한 4년을 함께 살았다. 다른 사람에겐 발바리, 땅개, 잡종견,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던 그 개는, 우리에겐 성견이 되었어도 여전히 강아지 같은 작은 개였다. 엄마가 심은 고추 모종을 수시로 뒤집어엎어서 혼나곤 했지만, 밥 주는 엄마의 손을 좋아했다. 장난으로 내가 도망치면 사냥개처럼 쫓아와서 술래잡기를 하곤 했다. 아버지가 술이 취해 들어와서는 마당의 빙고를 안고 들어와 거실에 들여놓고 주무시기도 했다. 빙고는 우리 가족과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빙고가 사라졌다. 사라지기 몇 달 전, 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집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빙고가 가는 걸 보고, 버스에서 내려 빙고를 집에 데려다 놓은 적이 있었다. 언제는 한 이틀 사라졌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대문을 열어놓고 지냈고, 동네의 다른 집에 들어가 똥을 싸고 오는 건 예삿일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빙고가 돌아올 줄 알았다. 한 이틀이 지나면,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다 눈에 띄면, 다른 집에서 똥을 싸다가 발견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믿음 때문인지, 처음엔 빙고가 없어진 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관심의 영역이 넓어진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어버린 나는, 빙고의 존재를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어두었던 것도 같다. 빙고가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그렇게 빙고는 사라졌다. 반려견을 잃은 사람들은 생니가 뽑혀나간 것 이상의 고통을 받는 것 같다. 아직 어리고 이기적이었던 내게 빙고의 실종은, 조금 흔들리다 빠진 유치가 준 정도의 통증쯤 준 것 같다. 오히려 시간이 꽤 지나고, 흔들리다 내 곁을 떠난 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들이 준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된 나이가 되었을 때, 빙고가 갑자기 떠난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아려왔다. 중학생 시절, 적극적으로 빙고를 찾지 않았던 죄책감과 부재에 대한 애도의 마음 모두를, 한참이 지나고서야 갖게 된 것이다.


빙고는 우리의 첫 개였고, 빙고 이후로 우린 개를 키우지 않았다. 고추 모종을 뒤집어엎어서 혼을 내던 엄마는, 빙고가 얼마나 멍청한 개였는지, 머리가 나빴는지 얘기하곤 했다. 그 멍한 행동 때문에 얼마나 웃었는지도. 술에 취해 들어온 밤, 집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존재가 아무도 없게 된 아버지는 가끔 이런 일화를 말하며 빙고를 추억하곤 했다. 여름날 빙고가 더워 보여서 찬물로 목욕을 시켜줬는데, 찬물에 놀랐는지 한참 비명을 지르더라는. 마치 그 일 때문에 집을 나간 건 아닌가, 하며 빙고의 실종이 당신 탓이라는 뉘앙스로 애도의 마음을 전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꽤 오랫동안 빙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시장에서 빙고를 처음 봤을 때, 박스엔 3마리의 강아지가 남아 있었다. 빙고는, 한쪽 귀는 바짝 서 있고 다른 쪽 귀는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 비대칭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 같다. 난 빙고를 지명했다. 명절 용돈 8천 원을 할머니에게 건네고서 빙고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가족이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쉽고 간단하게 우리 곁을 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존재들을 쉽고 간단하게 받아들이고 또 보냈던 그 시간들 때문에, 내 마음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애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진다.


3

난 개의 죽음을 기록한 이 책을 보면서, 나의 죽음, 더 나아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질병, 노화, 죽음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해결책은 <결국> 하나뿐이다. 즉, 환자<처럼>, 노인<처럼>, 시체<처럼> 살라는 것이다.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즐거움을 금할 것, 젊은 시절의 쾌락에 환멸을 느끼지 않으려면 노인처럼 굴 것, 삶이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하다면 송장처럼 지낼 것!"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중에서


개든, 사람이든 마지막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결국 침상에서 우리가 머릿속으로 쉽게 그릴 수 있는 '환자처럼', '노인처럼', '시체처럼'의 단계를 밟아갈 것이다. 평범한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작년에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수술을 앞두고 섬망증이 와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가 되셨을 몇 달을 잊을 수 없다. 다행히 지금은 회복하셨지만, 그때 몇 달은 죽음을 앞둔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선체험한 기간과 다름없었다. 인간은 끝이 오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진다. 남의 도움 없이는 간단한 일도 처리하지 못한다. 본의 아니게, 가까운 가족들과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본인과 가족은, 문득문득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가 그 기간 대부분을 망각하신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라 할 정도다.


죽음 앞에 무력한 건, 개뿐만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작년 몇 달간 줄곧 놓지 않았던, '죽음으로 가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다.


4

난 이 책에서 장 그르니에가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시각이 마음에 든다. 장 그르니에는 인간을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런 인간이라면, 위선적이라 해도 놀랄 것이 없다.


"개에 대해서 감상적으로 떠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개를 길러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행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전혀 장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그냥 바스라져 버릴 정도로 여린 돌조각들에,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칼날도 무뎌지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중에서


키우던 개의 죽음 앞에선, 단단한 인간인 장 그르니의 철학과 지성도, 여린 감정에 무뎌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지 않을까. 아무리 강하고 젠체해도, 우리의 마음은 잘해봐야 '단단한 칼날'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상처 주고 위협하기도 하지만, 여린 돌조각에도 부러지고 무뎌지는.


-기분 전환차 시작했던 독서는, 기분 자체를 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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