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집은 어디인가
늘어난 집 구경 프로그램을 보면서
TV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를 좋아한다. 그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남의 집 구경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일이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같은 아파트에서 열 집 이상을 봤다. 집을 구한다는 구실로 주말마다 내밀한 즐거움을 채웠는지도 모르겠다.
<구해줘 홈즈>와 비슷한 듯 아닌듯한 프로그램이 우기 이후 갑자기 돋아난 잡초들처럼 많아졌다. 나처럼 집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아닐 것이다. 취향이라는 게 그렇게 갑자기 생길 리 없으니까. 집 구경 프로그램의 증가는, 작년부터 급등한 부동산 시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다음 집은 어디로 할지 상상하곤 한다. '다음 집'은, 지금 사는 집보다 하나라도 나은 구석이 있다. 내 '다음 집'은 간격이 멀지 않은 징검다리처럼 꽤 오래 시야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 징검다리가 멀어졌다. 그냥 다리를 뻗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발밑은 잔물결만 출렁이게 되었다. <나의 판타집>이라는 프로그램은 게스트의 로망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집을 찾아주는 프론데, 평범하고 안락한 집이라 생각했던 나의 '다음 집'들이 말 그대로 '판타집'이 되어버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 대단한 로망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멀어져 간 '다음 집'이 자리하던 상상과 희망의 공간에, 집 구경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많은 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제 조금 더 만족스러운 집에 관한 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 말이다. 여러 집 구경 프로를 보면서 난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서 아파트만 고집할 일이 아니야.'
'나만의 집을 짓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야.'
<구해줘 홈즈>만큼 좋아하게 된 <빈집 살래>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서울에 있는 폐가를 사서 나만의 집으로 재탄생시키는 내용이다. 친절하게도 중간중간에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도 제시해준다. 그 프로를 보고 있으면, '우리 동네에 구입할 수 있는 폐가가 있을까'부터 '우리 가족을 위해 어떤 형태의 집이 좋을까'까지 구상하게 된다. 그 구상은 늘, '집을 지으면 10년은 늙는다더라' 하는 풍문에 수렴되곤 한다.
아저씨들은 집에 관심이 많다. 나보다 앞서 아저씨의 길을 걸었던 선배들은 은퇴하면 시골에 집을 짓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대부분은 은퇴를 조금 앞둔 시점엔 집과 정원을 손질하기 위해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곤 했다. 왜 많은 아저씨들은 시골집에 열광하고 정원을 가꾸려는 걸까. 왜 아저씨들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찾아보는 걸까. 여백이 없는 삶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누구나 반대급부를 원하니까. 난 가끔 한적한 곳에 머물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도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다시 징검다리가 내 가까이로 다가온다면, 어떤 집일지 궁금하다. 무섭게 불어난 집 구경 프로에서 본 온갖 형태의 집들이, 판타집이 되어 떠난 집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가 혼재된 중에 드러날 결과물은 과연 무엇일까. 여전히 '지금 집보다 지은 지 오래지 않은 아파트'일까. 나도 내가 현실적으로 택할 다음 공간이 궁금하다. 내 로망은 대단치 않아서, 내 판타집의 범주는 아주 넓다. 이래도 안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