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에게 영화 N차 관람은,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별개의 취미 활동이 되기도 한다. 난 기본적으로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못 본 좋은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데, 봤던 영화에 한정된 시간을 쓴단 말인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영화 채널에 하고 있어서, 봤던 영화지만 또 보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내가 자발적으로 봤던 영화를 찾아서 다시 본 경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 세상엔 덕후들이 많다. 어떤 영화를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고, 대사를 통째로 외워대는 사람들도 있고, 영화에 대한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것으로 일상을 도배하기도 한다. 나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몇몇 영화에 대해선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에 대한 여흥을 머릿속으로 즐길 뿐이지, 수시로 감상하려고 하진 않는다.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의 어떤 장면들을 다시 보는 일이 있었다. 콜라에 얼음을 띄워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시원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이런 시도는 꽤 유효하다. 최근 만들어 먹기 시작한 나의 얼음 콜라는, 예술에 가까운 액션 장면, 전투 장면을 보는 일이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마지막 전투씬은 캐릭터들의 향연이다. 난 전 우주적인 파티에 초대된 것처럼 어벤져스의 주역들이 저마다의 장기를 살려 전투하는 모습을 즐긴다. 과거의 타노스가 현재에 등장해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태도로, 폐허가 된 어벤져스 본부에 투구를 벗고 앉아 있는 장면으로 파티는 시작된다.
“세계의 절반을 없애면, 남은 절반은 잘 살 줄 알았는데, 너희들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 우주를 원자 단위로 박살 내고 재창조하겠다.”
사회자가 오늘 파티의 취지를 설명하듯, 타노스는 차분하게 자신의 신념을 읊조린다. 타노스는 말을 끝내고 일어서서 투구를 쓴다. 어벤저스에서 가장 강한 세 명의 히어로-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풍모를 보이며 쇼타임의 막을 여는 것이다. 세 명의 전사들과 타노스의 육박전은 그날 전투의 개막전이다. 건틀렛이 없어도 타노스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다. 강한 상대여야 나중에 그를 쓰러뜨릴 때 쾌감도 극대화되니까.
캐릭터가 하나하나 추가되며 전투는 음악의 변주된 후렴구처럼 화려해진다. 화려함의 극치는 되살아난 닥터 스트레인지와 그의 동료들이 만들어낸 차원의 문이 하나씩 열리면서, 사라졌던 히어로들도 포함해서 전 세계의 영웅들이 전투판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아, 이거지! 또다시 시작된 대규모 전투. 전투 안에서 작은 서사들이 이어진다. 컨틀렛을 옮기는 장면들, 여성 전사들이 뭉쳐 적에 대항하는 장면들. 판세는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듯 타노스의 우주선들이 폭파하면서 기울게 된다. 다른 우주를 지키다가 나타난 캡틴 마블의 등장. 두 번째 두근거림. 아 이제 뭔가가 되겠구나, 약간의 안도. 그리고 또 이어지는 치열한 공방.
<엔드게임>의 마지막 30분 전투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짜임새 있는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 봐도 무방하다. 삼겹살을 폭식한 것처럼 일상이 느글거릴 때, 이 퍼포먼스는 내게 다시금 시원한 긴장감을 전해준다.
애증으로 남은 연애 상대, <왕좌의 게임>
전투신을 여러 번 찾아본 두 번째 작품은, 애증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다. 많은 애청자들은, 몇 년을 큰 기쁨을 줬던 연애 상대가 마지막 한 달 동안 큰 실망을 안겨주고 떠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애증의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 앨범을 넘겨보듯 지난 장면들을 재생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하나의 전투신을 손에 딱 꼽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전투씬이 많다.
그 훌륭한 대부분의 전투씬엔, ‘존 스노우’가 등장한다. 틈이 많던 그의 전투 기술은 회를 거듭하며 점점 완전한 것으로 변해간다. 도무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때론 극적인 지원군 덕으로 승리한다. 별 볼 일 없었던 서자가 극한 상황을 계속 맞이하며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과정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다마구치를 키우거나 온라인 게임 캐릭터를 키우는 것과 비슷한 심정을 갖게 만든다.
최근에 찾아본 전투씬들은, 최고의 연애 상대와 함께 한 마지막 한 달의 기록이다. 지난 몇 년의 희열을 잊게 만들 정도로 실망했던 마지막 시즌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최근에야 다시 열어보게 된 것이다. 어떤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워진다는 진부한 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마지막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화이트 워커들과 인간 연합군의 전투’와 ‘용이 불을 뿜으며 킹스 랜딩을 살라버리는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회차의 마지막마다 등장하던 대규모 전투들은, ‘청소년용’이었다면, <왕좌의 게임>의 전투씬은 이를 능가하는 리얼판이다. <왕좌의 게임>의 거대한 전투씬은, 캐릭터들이 중간중간에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전투씬 속에 개별 인간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살아있다. 마지막 시즌의 전투 장면은, 이전 시즌들의 스케일을 훌쩍 뛰어넘는 최대치의 카타르시스를 전사한다. 그와 동시에, 이겼지만 이긴 것 같지 않은 기분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한껏 들떠서 전투를 보고 난 후엔, 싸운다는 게 뭘까, 뭘 얻으려고 우린 그렇게 전투력을 키우며 살아갈까 하는 회한이 생긴다.
난 <왕좌의 게임>의 마지막 한 달의 기록을 돌려보며,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안 좋은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캐릭터 중 하나의 파탄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지만, 그 서사 또한 그 이야기가 갈 수 있는 여러 길 중 하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일상의 전투에서 지칠 때마다, 난 <어벤져스 : 엔드 게임>과 <왕좌의 게임>의 전투씬들을 거듭해서 돌려 볼 것이다. 그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전투 장면들은, 역설적으로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란들이 얼마나 지질하고 구질구질한지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어쩌면, 그 장면들을 돌려보면서 싸울만한 싸움을 고민하고, 이겨도 마땅한 캐릭터가 되기 위해 아주 조금은 애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