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나 미드에서, 학생들이 댄스파티를 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미국은 졸업이든 축제든, 짝을 맞춰 춤을 추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가무 하면 뒤지지 않지만, 칼군무나 막춤 말고 댄스 스포츠 형태의 춤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에서 댄스파티 장면이 나오면, 어김없이 그 옛날, 대학교에서 수강했던 댄스 스포츠의 추억이 떠오른다.
1학년 교양 과목이었기에 모든 신입생이 댄스의 세계에 입문했다.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은 교육대학의 특성상, 남학생은 전부 여학생과 짝이 되었다. 남은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짝을 했다. 한 명의 파트너를 정해 자이브와 차차차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시험까지 치는 과정이었다. 난 동기보다 4살이 많은 장수생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친한 동갑내기 친구와 짝이 되어서 편한 마음으로 춤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수업의 백미는 시험이었다. 시험은 댄스 대회 형식으로 치렀다. 시험 날에 체육관은 거대한 댄스홀이 되었고, 우린 정장과 구두, 그리고 여학생들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채 등번호를 붙이고 댄스홀로 나간다. 20개의 팀 중 14팀이 2라운드에 진출한다. 최종 라운드에는 6팀만 올라간다. 1라운드에 머문 학생들은 C학점, 2라운드는 B학점, 최종 라운드까지 가면 A+학점이었다. 꽤 흥미롭고 긴장되는 시험 방식이었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기숙사 곳곳엔 춤판이 벌어졌다. 기숙사에 신입생이 제일 많다 보니, 기숙사 구석구석 스텝을 밟을 수 있는 공간은 춤을 추는 커플들로 복작거렸다. 우리 팀이 선택한 곳은, 기숙사 지하 세탁실이었다. 커다란 타일이 박힌 바닥에 한쪽엔 세탁기가, 한쪽엔 탁구대가 있는 큰 공간이었다. 눅눅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많이 띄지 않고 작은 볼륨의 음악도 잘 들린다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가 내려가니 이미 한 팀이 연습하고 있었다. 남학생은 키가 작았고 나보다 어렸지만, 한 5살은 많아 보이는 노안이었다. 어깨 뽕이 불룩한 아버지의 정장을 입고 연습 중이었다. 그의 눈빛은 이글거렸다. 차차차 스텝을 밟을 때마다 골반이 몸에서 분리되지나 않을까, 할 정도로 현란한 몸놀림을 보였다. 상대 여학생을 보니, 남학생의 열정이 이해되었다. 예쁘고 참한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에겐 댄스 이상의 열망이 보였다.
여학생은 남학생보다 키가 컸지만, 무척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린 그 커플의 댄스에 매료되어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남학생의 작은 키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눈빛과 현란한 골반 때문인지, 그는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아마추어의 눈에도, 그 팀이 최종 라운드에 진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세탁실에서 피어나는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댄스의 불꽃이란!
한껏 풀이 죽은 채로, 우리도 곧 연습을 시작했는데 그 커플이 보여줬던 댄스의 수준에 압도된 탓일까, 생글생글 잘 웃던 내 친구가 나의 잔 실수를 지적하며 짜증을 냈다. 내 파트너는 망신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시험 점수에 대한 걱정, 댄스를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극도의 긴장 상태로 빠져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말다툼을 하고 각자의 방으로 갔다. 우린 주말이 지나고 다시 만나 화해를 했다. 그리고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코너에 몰렸다고 느낀 상황에서 우린 평소 서로에게 보지 못했던 면을 보고 놀랐지만, 그 기회로 우린 좀 더 편하고 친근해진 것 같았다.
드디어 댄스 대회가 시작되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 멋지고 아름답게 꾸민 스무 쌍의 댄서들이 댄스홀에 모였다. 우린 커다란 등번호를 서로의 등에 붙였다. 첫 번째 라운드는 자이브.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다른 커플과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차근차근 스텝을 쌓아갔다. 우린 1라운드를 통과했다. 2라운드는 차차차였다. 몇 팀이 탈락한 탓에 공간이 좀 넓어졌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좀 편해졌고, 우리의 스텝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2라운드 진출은 우리에게 B학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의 스텝엔, 서로를 의지하며 익숙하지 않은 리듬과 동작에 몸과 마음을 맞추며 보낸 시간이 녹아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의 지하수가 오랜 시간 떨어지며 만들어낸 석회 동굴의 석순처럼 한 동작 한 동작은 희열과 갈등이 산화와 풍화의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점수와 걱정을 벗어던지고 우린 그 순간 춤에 빠져버렸다. 음악이 끝나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열정은 춤사위에 녹아 산화되어 버렸고, 그래서 우린 홀가분했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았다.
선생님은, 최종 3라운드로 올라갈 팀을 하나씩 호명하며, 간단한 심사평을 덧붙였다. 선생님이 우리 팀의 이름을 부르시곤 웃으며 덧붙였다.
“표정이 예술인 팀이에요.”
나와 친구는 춤에 몰입한 나머지, 춤을 추는 내내 무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선생님의 눈엔 웃음이 날 정도의 진지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최종 라운드는 각 팀의 창작 안무를 넣어 만든 춤을 췄다. 이미 우린 A+점수를 확보했고, 더 이상 점수는 의미가 없었다. 그저 즐길 뿐이었다. 세탁실에서 봤던 그 커플 옆에서 우린 우리만의 춤을 추었다. 춤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다른 목적과 동기가 섞여 들곤 하지만, 춤에 깊이 몰입하는 순간 그것들은 모두 풍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나는 그날 이후로 종종 생각한다. 나의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때, 창피할까 봐 움츠리곤 한다. 그렇지만, 막상 음악이 흐르면 결국엔 몸을 맡긴다. 춤은 충분한 연습을 하지만, 인생은 사전 연습이 없다. 난 늘 무대에 서 있는 셈이고, 그 무대에서 춤을 추는 법은, 추면서 배워야 한다. 때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글쓰기도 비슷한 것 같다.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움츠리게 만들고 시도하려는 마음을 꺾는다. 하지만 결국, 글도 쓰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도하고 끝까지 스텝을 밟다 보면, 심사위원이 웃으면서 말해줄지도 모른다.
“표정이 예술이에요.”
그러면 그걸로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