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위로’와 ‘상징’ 같은 거창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사실 이 글이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옥상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펜트하우스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그려지는 운치 있는 옥탑방은 아니다. 그냥 한쪽 구석에 노란 물탱크가 자리 잡고 있고, 비 온 다음 날이면 부서진 시멘트 바닥에 물이 찰랑찰랑 고이는 그런 낡고 지극히 평범한 옥상 말이다. 가끔 떠돌이 개가 올라와 똥을 싸놓기도 하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사람이 다녀간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그런 누추한 옥상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누군가 한쪽 구석에 커다란 비닐을 깔고 그 위에 고추를 말리곤 하는데, 또 누군가는 그 주인 없는 고추를 바라보며 "옥상을 혼자 다 전세 냈냐?"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그런 곳이다.
옥상은 공공장소지만, 누군가는 속옷을 널고, 누군가는 상상 속 인물과 대화한다. 인간은 공동의 공간 속에서도 각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같은 장소라도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질적인 사적 경험이 공존하는 공간이야말로 공동체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SF와 로맨스와 드라마가 뒤섞인 온갖 상상을 펼치게 하던 이곳은 사실 한동안 내 삶에서 어둠 속의 모닥불 같은 위안의 상징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쫄딱 망했다. 우리가 살던 2층 양옥집을 경매업자에게 넘기고 언덕 위 작은 빌라로 도망치듯 이사를 했다. 거미줄 같은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빌라가 나타났고, 그곳에서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예전 집에선 삼촌이 군대 간 후 내가 혼자 널찍한 방을 썼는데, 새 집에서는 큰방을 장롱으로 나눠 만든 1평짜리 공간이 내 방이었다. 컴퓨터와 가전제품은 이미 경매로 다 넘어간 후였고,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어두운 시기였다.
모든 것이 후퇴한 상황에서 나는 기적처럼 한 가지 좋아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옥상이었다. 언덕 위에 있는 빌라의 옥상은 하늘과 가까웠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풍경’이었다. 저녁이면 하나둘 불을 밝히는 작은 집들과 골목길 가로등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앉은 별처럼 아름다웠다. 바람은 다른 건물에 막히지 않고 곧장 나에게로 불어왔다. 나는 그 바람을 최초로 맞이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옥상에 혼자 서서 꿈에 젖듯 풍경에 빠져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현실에서는 나 혼자뿐이었지만, 밤에 1평짜리 방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옥상에는 어린아이, 담배 피우는 노동자, 짝사랑하던 친구,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소년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내가 서랍에 넣어둔 이야기들의 무대도 대부분 바로 이 빌라의 옥상이었다. 대학 때 교내 문학상에서 입상한 내 첫 단편 소설도 이 빌라와 옥상을 배경으로 쓴 이야기였다.
그 옥상은 그렇게 내게 위로와 상징이 되었다. 삶이 캄캄하거나 답답할 때마다 우리는 위로가 되는 물건이나 장소를 찾는다. 옥상, 뒷마당, 동네 초등학교의 낡은 스탠드, 동네 입구 나무 아래의 작은 평상, 책상 위의 작은 조약돌,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처럼. 누구에게나 이런 ‘위로의 상징’은 존재한다. 이런 상징들은, 우리 삶의 기록 매체가 된다. 우리의 삶과 내면이 새겨진.
삶의 굽이굽이마다, 위로의 상징을 지니고 살아가고 싶다. 삶은 항상 크고 눈부신 것들로만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작고 허름한 것들이 오히려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우리를 지탱해 준다. 우리가 힘들 때 기대는 것은 화려한 이상보다는, 손에 닿는 현실의 감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