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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은 말

by 송광용

언젠가 아이들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글쓰기 주제로 제시한 적 있다. 글쓰기가 끝나면 아이들이 쓴 글을 빠르게 훑으며 공책들을 바꿔 들었다 놨다 한다. 많은 아이들이 고마워, 사랑해, 잘했어, 이런 말들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어떤 여학생의 글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수영이(물론 가명입니다)는 준환이에게 “널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준환이는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착하기 때문이란다. 글의 말미에는, '준환이의 옆에 고양이처럼 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난 누군가의 곁에 고양이처럼 있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한동안 생각했다. '고마워, 사랑해, 잘했어'이 3종 세트를 벗어난 말이 나와서 반가웠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서 얼마나 또 설렜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뭐라고 피드백을 써줄까 생각하다가, 아무 말도 못 적었다. 그 마음은 혼자 간직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아서.


다시 다른 공책들을 살피다가 준환이의 공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난 준환이의 글을 읽고 와, 하고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준환이는, '잘 생겼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썼다. 이유는, 집에서 맨날 엄마가 자기가 못났다고 한다는 거였다. 준환이 엄마의 그 말이 진담인지, 장난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준환이는 그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준환이에게 잘 생겼다는 말은, 단순한 외모 칭찬은 아닌 것 같았다. 조용하고 소심한 준환이는 자신이 일상에서 딱히 칭찬받거나 인정받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잘 생겼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기에,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인정의 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준환이는 결국, 자신을 향한 온전한 지지와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거였다. 그렇지만 준환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지와 인정을 넘어서 자기 곁에 고양이처럼 있고 싶은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난 다시 수영이의 공책을 찾아들었다. '준환이는 잘 생기고…'로 시작하는 문장과 준환이의 문장을 번갈아보았다. 난 당장이라도, 준환이를 불러서 수영이의 공책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 봐. 수영이가 이렇게 썼어. 네가 잘 생겼대. 네가 듣고 싶은 말이지? 선생님이 봐도 넌 잘 생겼어.”

이렇게 호들갑 떨며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수영이가 가슴속에, 빗물을 받듯이 한 방울씩 받아 담아놓은 말들을 내가 쉽게 부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 아이들은 각자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될까. 난 어땠나 하고 생각해 보니, 결국 듣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나와 누군가의 진심은 하나로 모이기보다는 엇갈리고 흩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잦았다. 그래서인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그 순간은 마치 기적처럼 반짝거렸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빛나는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다가가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내 마음에 컵들이 도열해있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할 때마다 그를 향한 말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려 컵을 조금씩 채운다. 어떤 컵은 반 정도 찼고, 어떤 컵은 찰랑거릴 정도로 찼지만 아직 건네지 못했다. 그 컵들을 잘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 이름이 적혀 있을 컵들을 건네받고 싶다. 내가 죽을 즈음엔, 내 마음에 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주인들을 찾아가서 휑한 찬장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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