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곤 한다. 요즘 아이들이 각종 영상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귀로 듣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등장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 나오면, 아이들은 그 인물이 마치 앞에 있는 듯, 허공에 대고 항의를 시작한다. 항의가 길어져서 책 읽기를 더 진행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흥분한 아이들을 잠시 진정시키고 다시 이야기를 읽어나간다. 아이들은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고 감정이입한다.
올해만 해도 장편 동화를 세 권쯤 읽어줬는데, 마지막 문장이 끝났을 때 책마다 아이들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
“어? 진짜 끝난 거예요? 에이.”
“결말이 이상해요. 맘에 안 들어요.”
대개 이런 반응은, ‘열린 결말’일 때 나온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 있는 게 보이는 것 같다. 다양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거듭 느끼는 건, 아이들은 명확하게 사건이 마무리되는 결말을 좋아한다는 거다.
얼마 전, 내년에 출간이 예정된 동화 원고를 고치고 있는데, 문득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반응이 떠오르는 거다. 어, 이 정도면 결말이 또렷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이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물음표가 생각나서 좀 더 확실한 결말로 수정하기도 했다. 동화에서 확실한 결말의 방향은 아무래도, 인과응보,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성격을 지닌다. 문학에서 인과응보, 사필귀정, 권선징악적 주제는 옛날 작품들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현대적인 작품에서 그런 주제는 세련되지 못한 걸로 치부된다. 혹자는 그런 감각들이 낡은 거라 말한다. 개인의 삶에서 이런 감각들은 정말 낡아서 버려야 할 것들일까.
나이가 들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의 감각인 것 같다. 인과응보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물고 물린다는 뜻으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과 의미가 통하는 말이다. 사필귀정은,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바른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릴 적엔, (왠지)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을 것 같고 (왠지)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걸 얻을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 자라면서 세상 나쁜 인간들이 떵떵거리는 걸 보거나, 좋은 사람들의 불행을 봐 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옛적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져 왔다.
얼마 전에 옛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가 아는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 안에서 희미해진 감각을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다. 친구의 얘기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면 돕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선천적으로 마음에 선의가 가득한 이에 관한 것이었다. 소상공인이 모두 어려운 시기인데, 정말 미스터리하게도,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그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 자기 걸 손해 보면서도 주변을 챙기는데, 더 좋은 길이 열리고 번창한다고. 친구는 평소 그의 선행과 그 성공을 연결 짓고 있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선, 세련된 이성으론, 인과 관계가 희박한 얘기로,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일이다. 그렇지만 그 얘길 듣는 그 순간에, 그 말이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거다. 내 이성보다 마음이 먼저 흔들렸다. 그래, 어쩌면 내 욕심을 채우는 일보다 다른 이를 향한 선의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꼭 뭔가 보상받지 않아도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난 그 옛적 감각들을 낡고, 초보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해 왔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난 스스로, 세상의 것들을 바른길로 돌아가게 하는데 일조할 만한 주제가 못 된다고,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빠듯하다고, 그렇게 선의가 밖으로 흘러가는 걸 막아왔던 거 같기도 하다.
낡고, 초보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그 감각을 회복하고 싶다.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을 따지는 합리적 인과 관계 대신, 오래된 그 감각을 발산하고, 실험하며 지내보고 싶어졌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바른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게, 아무래도 내 주변을 좀 더 보드랍고 풍요롭게 만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