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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에 대하여

by 송광용

어느 아버지가 외국에 출장을 갔다가 두 아이를 위해 두 종류의 초콜릿을 사 왔다. 8살 난 첫째 아들은 6살 여동생이 받은 초콜릿을 가지고 싶었다. 오빠는 여동생과 초콜릿을 바꾸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초콜릿을 가지고 오게 한 다음, 초콜릿의 포장을 뜯고 그 안에 있는 얇은 내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너 혹시 모차르트 아니?”

 “응, 지난주부터 피아노 학원에서 모차르트 연습을 시작했어.”

 “이 초콜릿은 모차르트가 나고 자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만들어진 거야. 그 도시 곳곳엔 모차르트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가 있지. 너도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위대한 음악가잖아. 그가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이 바로 이 도시에 있어. 이 초콜릿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차르트 초콜릿’이야. 아주 역사가 오래됐지.”

 “모차르트라니, 대단한 초콜릿이구나!”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건,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사줄 땐, 똑같은 걸로 사라는 조언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삶과 에세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은유다. 초콜릿은 모든 이들이 손에 쥔 자신의 삶이고, 초콜릿을 감싸고 있는 내지는 에세이다.


 삶이 이야기로 표현될 때, 그 삶은 붙잡고 싶은 가치를 내포하게 된다. 그저 흘러가버릴 수도 있었던 일상이 신선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에세이는 삶을 특별한 것, 즉 ‘모차르트 초콜릿’으로 만들어 준다. 포장 속 얇은 내지를 들추어 보는 순간, 손 안의 초콜릿은 특별해진다. 특별하게 만든다고 해서, 다른 초콜릿으로 속이는 것이 아니다.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또 다른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삶을 ‘이야기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어 정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있었던 일을 극적으로 재조합하고, 작가의 통찰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상을 기술하는 일기와는 조금 구별된다. 일기는 재료에 가깝다면, 에세이는 좀 더 가공된 제품에 가깝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록하면 픽션이 된다.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논픽션이다. 일어난 일의 경계 속에서 그 일을 최대한 극적으로 구성하여 쓰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의 영역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만일 거짓이 섞일 경우엔 읽는 이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에세이는 일어난 일이라는 요소를 재구성하고, 사소한 부분은 가공하여 독자가 그 이야기에 최대한 빠져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난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작가 수전 티베르기앵이 에세이의 특징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좋아한다. 수전은 자신의 책에서 도리스 레싱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각각의 개인을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고 개인적인 경험을 그보다 큰 무언가로 바꾸어, 개인적인 것을 일반화하는 것”

 그리고, 에세이의 형식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에세이는 소설과 시의 경계 위에 존재한다. 에세이에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 형식을 빌려 말하고, 시를 다듬을 때처럼 다듬는다. 소설 형식은 진술을 너무 야단스럽지 않게 유지해준다. 시 형식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확장해준다. 소설 형식과 시 형식의 이런 균형이 바로 에세이를 창의적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다. 그로 인해 에세이는 민첩하면서도 날카롭다.    -수전 티베르기앵,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어떤 에세이는 시에 가깝다. 또 어떤 에세이는 소설처럼 느껴진다. 수전의 말처럼 이건 에세이의 형식적 특성에 기인한다. 에세이는 소설과 시의 경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수필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이나, 1~2세기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 유명 작가들의 수필을 보면, 산문시인지, 산문인지 구별하기가 힘든 작품들이 많았다.


픽션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에세이는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준다

 요즘 에세이의 트렌드라고 할까. 오늘날의 에세이는 ‘시적 상징과 의미’보다 서사의 비중이 높은 형식이 많아졌다. 나 역시 에세이는, 서사성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바탕이 되고, 그 속에서 삶의 진실 내지 본질을 건져 올려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야기만 있어서는, 또 에세이라고 봐줄 수 없다. 이야기만 있는 건 소설이고, 통찰과 언어만 남으면 시가 된다. 하지만 에세이는 이야기와 성찰이 모두 담겨 있어야 한다.


 나는 에세이를 써왔고, 삶의 이야기를 건져 올려 정제하고 다듬는 이 작업을 사랑한다. 픽션을 쓰는 일도 흥미롭지만, 에세이만큼은 아니다. 픽션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에세이는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준다.


 오늘도 난 손에 쥔 내 초콜릿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러다 초콜릿 포장지의 한 귀퉁이에서 작은 글씨를 발견한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 글씨는 삶의 이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실’이며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이다. 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삶도 마법 같은 일상으로 바꾸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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