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삶의 시나리오’라는 개념은 내 마음을 철근 같은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사람은 어릴 적 경험에 따라 인생의 시나리오가 정해진다는 얘기를 언젠가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은 기정사실 같았다.
난 이런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는 아버지(어머니)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 심지어 부모를 미워하고 분노했어. 하지만 그가 커서 문득 자신을 돌아봤더니 글쎄, 부모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거야.”
내 마음에 벽돌장을 올려놓던 그런 말들은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TV 속에서,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수시로 들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벌써 나쁜 운명은 나를 잠식했을지 몰라. 음험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겠지.’
인생의 추웠던 기억을 나누는 자리에서, 냉기의 근원은 모두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가 술에 사로잡혀 들어오는 날엔 가족 모두가 긴장했다. 우린 광기를 피해 한밤에 집 밖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집안 살림이 모두 부서진 광경도 보았다. 어머니는 한 번씩 푸념하듯 말했다.
“친구끼리 술을 배워서 그래. 어른한테 술을 배웠으면 저런 주사는 없었을 텐데.”
그 말은 성인이 되기 전 부모를 잃은 아버지를 연민하는 말인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인지, 아들을 향한 조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견디고 참아내다가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집을 걸어 나가셨다. 나와 동생은 한 달쯤 뒤에 연락 온 어머니를 옆 도시에서 만났다. 그 날 헤어질 때, 이제 더 이상 엄마와 한 집에서 살지 못할 거라는 감각이 그제야 온몸에 차올라서, 울음이 터졌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를 이해했다. 오히려 우리가 클 때까지 기다려준 데에 감사했다.
어머니가 괴로움을 많이 흡수해주신 덕에 나와 동생은 괴로움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로 인한 긴장은 어릴 적부터 주기적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난 막연히 짐작했다. 내 안의 어딘가에서 뭔가가 태어났고, 음험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영혼을 뚫고 나올 거라는.
고교 시절 친한 친구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친구가 말했다.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난 그 친구의 상실감을 이해하는 한편, 마음속에선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나의 시나리오는 뻔했다. 이야기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이야기의 결말은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지금은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 책 속의 한 구절이, 뭐라도 잡고 싶었던 내 손에 잡혔다. 언젠가 술 취한 아버지에게 쫓겨나 들어갔던 지하 기도실에서 올렸던 기도의 응답 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내가 다시 뭔가를 할 수 있게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인생의 시나리오가 정해진다. 하지만 애초에 시나리오는 이야기의 계획이지, 결론이 아니다. 수정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나리오는 수정이 가능한 거라는 선언은 나로 하여금 다른 끝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난 내 시나리오를 고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성인이 되고 수많은 술자리에서 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내가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내게 주어진 시나리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내 몸이 술을 만나는 순간, 중독 인자가, 난폭 인자가 발현할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이십 대에 내가 빼놓지 않고 했던 기도는, 내가 의식적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망가졌을지도 모르는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였다.
세월이 지나,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 사이, 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았다. 나는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아이들은 가끔씩 아빠가 좋다고 말한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내 삶의 이야기를 태운 거대한 배는 나의 작은 발길질에 뱃머리를 조금씩 돌렸고, 처음의 항로를 벗어나 여기까지 왔다.
난 내 시나리오에 좋은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애쓸 것이다. 따뜻한 해변의 해지는 광경 같은 배경을 많이 넣고,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삶은 아름다운 컷으로 가득하다는 말을 증명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거나 상상해서 쓴 이야기를 읽고, 그 옛날 음습한 곳에서 태어난 내 안의 무엇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넌 괴물이 아니라고, 너로 인해 내가 나를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이제 난 시나리오의 내용 중 하나가 수정되기를 바란다. ‘난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며 살아갈 것이다.’라고 적힌 부분 말이다. 아버지의 삶에도 좌절이 있었고,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고, 그걸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시나리오를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겠다는 의식도 못한 채로 정해진 결말로 치달아 왔을 것이다. 그는 이제 다른 의미를 술잔에 담아 술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정이 쪼개진 것에 대한 회한을 담아, 자신도 어쩌지 못한 습관에 대한 후회를 담아서. 우리 모두는 시나리오 앞에서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지금도 대부분의 날에 취해있다. 그가 자식을 위해 애썼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 내 마음은 측은함으로 차오른다. 그럴 즈음, 그는 비틀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술값으로 쓰일 것이 분명한 돈을 보내달라거나, 손녀들이 보고 싶으니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한다. 취한 그 목소리를 들으면 쌓아가던 측은함은 흩어지고 다시 화가 올라온다.
이제 그의 삶에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그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시나리오를 붙잡고 씨름할 마지막 과제일지 모르겠다. 난 분노와 이해를 오가며 아주 천천히 시나리오를 수정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