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영혼들의 험난한 심리학 여행
(이 포스팅은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른 글들과 달리 구체적인 심리학 지식을 다루지 않으며, 심리학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특성에 대해 다룹니다. 또한 제가 졸업한 학교는 심리학 커리큘럼이 인지,신경 분야에 많이 집중 되어있어 심리학 전공에 대한 견해가 타학교 학생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대학에서 열리는 심리학 수업은 항상 인기가 많다. 심리학과가 없는 학교 조차도 심리학 관련 교양은 항상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심리학과 대학원은 항상 두자릿수 경쟁률을 자랑한다. 복수전공에 진입하기 위한 학점컷이 높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다른 인기 학문 분야(경영,컴공 등)와 달리, 심리학 전공은 실용적 목적과 관련있는 분야는 아니다. 교양 심리학개론 수업도 다른 교양에 비해 '꿀강의' 취급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취업과 성공을 중시하고 실용 분야에 사람이 쏠리는 한국 대학의 트렌드를 감안하면 이러한 현상은 새삼 신기하기만 하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심리학에 관심이 많을까?
심리학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의 개강 초 풍경은 흡사 입시학원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거의 모든 수강생들이 열정에 가득 찬 눈빛으로 수업을 듣는다. 마치 심리학이 자신에게 무언가 답을 내려주길 원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렇게 사명감에 가까운 마인드로 수업을 수강하는 대학생들 중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심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다. 부모님과의 싸움이 잦았던 사람들, 화를 잘 못내고 쌓아두는 사람들, 자기 세계관이 뚜렷해 머릿속에 공화국 하나 정도는 세우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 밑빠진 독처럼 결핍되어있는 사람들, 페이스북에 긴 글을 종종 쓰고 빌리 아일리시와 쏜애플의 노래를 즐겨 들으며 ‘넌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법한 그런 사람들.... 이들은 ‘내 마음은 왜 이럴까?’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 마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심리학 수업을 수강하게 된다. 특히 한국의 학생들은 입시를 빌미로 성장과정에서 부모님과 많은 갈등을 빚고, 그 과정에서 충분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며 언어적, 물리적 상처를 받고 자라게 된다. 여기에 유교적인 가정교육관이 겹치며 엄격한 틀 속에서 억압된 채 성장하는 청년들이 대다수다. 이렇게 자신의 환경적 또는 천성적 결함으로 인해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는 일부 학생들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부모님께 상처받은 이유, 나의 언어가 남들보다 더 부정적인 이유, 내가 완벽주의에 빠져있는 이유, 연애가 잘 안되는 이유 등등의 해답을 찾고자 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시절부터 강남8학군의 보수적인 학풍 아래 개성을 거세당하는 환경속에서 자라고, 올바름을 강조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재수생활로 인해 몸건강이 매우매우 악화되어 거동이 불가능해 휴학을 해야할 정도였고, 이로 인해 심리상태가 매우 나빠졌다. 재수까지 하면서 대학에 왔는데, 대학 새내기 시절을 병원을 전전하며 보낸 것에 대한 서러움이 너무 컸다. 그래서 2학년이 되자마자 심리학 수업을 듣고 서적을 읽으며 내 몸과 마음이 왜 망가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물론 이런사람들만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에 (누구나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심리학 수업은 이런저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치열한 생태계를 형성하게 된다.
맥락이 이렇다 보니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사명감같은 게 느껴진다. 실용적 목적이 아닌 내적 동기에 의해 공부하는 것이다 보니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학점 경쟁이 치열하다. 대학원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임상이나 상담 분야의 경우 미래가 긍정적인 편이 아닌데도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진학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심리를, 인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배운 게 컸고 나는 행동심리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실험검증 때의 통계라든지 그런 증명 부분들이 빡셌지. 실제 심리학은 인간을 다루지만 상당히 건조하고 논리적이고, 통계와 확률의 싸움인 것 같았어" (심리학 복수전공을 하려다 포기한 과동기 L양)
"선택강의여서 안들어도 되는 수업이었지만 평소 사람 심리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수강했어. 막상 수업을 들으니 기대했던 것보다는 뻔한 내용이었어. 조금 더 내가 몰랐던 내밀한 심리를 알고 싶었는데 이미 알고있는 것들이라서 기대보다는 덜 신선했지. 그래도 재미있었어 도움도 되고" (교양 심리학 수업 수강생 Y양)
"청소년기에 우울해서 상담쪽에 관심을 갖다가 나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에 상담사로 진로를 정하고 심리학과 진학을 하게 되었어. 고등학교 때 했던 진로탐색 덕분에 어느정도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사회현상적인 것과는 관련 없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게 내 기대와 달랐어" (심리학과 학부생 H양)
"처음엔 심리학을 배우면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심리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사람을 더 모르게 되는 것 같아" (심리학과 대학원생 L군)
이렇게 불같은 마음으로 심리학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 열정을 잃게 된다. 대부분 '이건 내가 원하고 바라던 심리학이 아니야!'라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이 그들의 불같은 열정을 식게 만드는 것일까?
심리학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실망은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심리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는 보편적 인간 심리에 대해 연구한다. 실제로 개인차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게 심리학 연구의 약점임을 교수님께서 지적 해주신 바 있다. 이렇게 딱딱한 과학적 접근이 수업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내가 왜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는지, 왜 이성에게 방어기제를 갖게 되는지, 왜 생각이 너무 많은지 등등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마 학생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언어적 메시지에 대한 해석을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흐름을 추적하는 방법을 내성법(Introspect)이라고 하나, 과학적 엄밀성을 중시하는 현대 실험심리학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의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과거의 트라우마나 부정적 에피소드에서 찾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 또한 비과학적이어서 심리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대부분 심리학 초반에 프로이트나 융 등을 다루는 수준에서 끝난다) 사실 심리학에서 배우는 내용은 거의 신경, 생물학에 가까우며 크게 보면 '보편적 심리 구조'와 ‘자극에 대한 반응’을 배우는 것에 더 가깝다. 이렇게 사람들이 심리학에 열광하고 실망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와 사회가 심리학을 소비하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미스매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내 마음이 왜 힘든지에 대해 추적하는 경향이 생긴다. 문제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끈질기게 원인을 찾았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나의 심리가 괜찮아질까?? 오히려 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더 커지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환경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겠는가?
대학생들이 심리학을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한 점도 심리학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전문대학의 상담심리학을 제외하고, 학문적 수준의 심리학을 가르치는 곳은 서울권의 경우 공학 6곳 여대 3곳밖에 없다. 그래서 남학생들의 경우 인서울 중상위권 이상의 성적을 내지 않으면 심리학과가 있는 학교를 진학할 수 없기 때문에 (또는 지방 국립대에 진학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학과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 (한국에서는 심리학이 이렇게나 특권적인 학문이다. 자기 학교에 심리학과가 있다면 복 받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심리학 개론을 듣고 더 심화된 수업을 수강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나도 편입하기 전까지는 심리학과가 없는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심리학이나 사회학 교양 수업을 수강하면서 심리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 학교에 편입해 심화 수업들을 수강한 뒤에야 이 판타지가 깨지게 되었다. 이렇듯 심리학을 어디서든 깊게 탐구할 수 없는 환경이 심리학에 대한 갈증과 환상을 더욱 키운다고 생각한다. 교양 심리학개론 수업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학문의 개론수업은 다 흥미롭기 때문에 전공 적성에 대한 판단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이 여정이 실패로 끝나는 것일까? 나 역시 심리학에 실망하고, 학점을 털리고, 석사 진학을 단념하게 되었지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결국 남게되는건 심리학 지식이 아니라 심리학을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었다. 비슷한 심리적 고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친구들과 심리학 수업을 같이 들으며 친해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내면과 관련한 주제로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늘 정이 넘치고 서로를 챙겨주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주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마음에 대한 얘기를 서스럼없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심리학 덕분에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심리학 덕분에 마음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마음이 뇌의 작용임을 배우게 되면서 성격, 감정 등의 원인을 형이상학적 관념의 마음에서만 찾지 않고 육체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예전엔 심리가 힘들면 말그대로 의식 수준에서의 언어적 마음 풀이에 애썼다면(이래서 힘들었어 저래서 힘들었어 이런 생각이 들었어 등...), 심리학을 배운 이후에는 체력을 키우고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걸 먹으려고 한다. 그런 육체적 작용이 생각을 긍정적으로 변하게 해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처음 기대와는 다를지라도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당히 매력있는 학문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심리학은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시작하지만 끝까지 남는 사람은 몇 없는 고독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심리학 연구에 정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적성에 맞아서든, 치유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서든 간에 쉽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의 노력이 심리학에 대한 미신적 오해를 타파하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인간상을 이해시키는 데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고독하게 심리학 공부를 하는 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더이상 심리학에서 답을 찾고 싶어할만큼 아픈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마음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책 속의 심리학 지식에만 기대지 않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서울대 사회과학 대학원 경쟁률 https://blog.naver.com/bluestar_90/220483904289
심리학 SNS https://blog.naver.com/wlseogml11/220410930731
장기기억 모델 https://virtualuniversity.in/mod/book/view.php?id=188&chapterid=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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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3000won.com/baekya
백야는 현재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플랫폼 삼천원에서 아티스트이자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탭에서 고민상담도 받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