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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Jun 27. 2023

[보따리 강사] 내가 가장 아쉬운 것은

2023년 1학기를 보내며

수업이 있는 날엔 출근 가방을 들고 가 강의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온다.

강의실에 잠깐 보따리를 풀었다 챙겨 돌아오는 나는, 보따리 강사다.


학생들은 날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학교 메일 계정엔 내 이름과 함께 직급인 [강사]가 적혀있다.

어디선가 학생이 교수와 강사를 구분해, '강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단 이야기를 들었다. 학생의 머릿속에 그어져 있을 구분선에 씁쓸해하다가, "교수는 나의 직급일 뿐이고, 여러분과 나는 선생과 학생 관계이니 선생님이라 부르라"던 한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강사는 나의 직급일 뿐이니, 혹 어떤 학생이 날 강사님이라 부른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다짐해 본다.


그럼에도 강사로서의 설움은 분명 있다.

가장 쉽게 떠올리는 건 월급일 테다. 방학 땐 수업이 없으니 월급이 없다. (배달 두 번 시켜 먹으면 사라질 돈이 들어오긴 한다) 그리고 연구공간이 없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학교 어딘가에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있다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며 혹 학생들을 마주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글은 강사의 처우 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쓰는 것은 아니므로 이 이야긴 이쯤 해두자.


그보다 날 서럽게 하는 것이 있다.


수업을 하다 보면 내가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맞을까 싶고. 무엇을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내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닿고 있는 것일지 불안해한다. 그러다가 간혹 학생이 건네는 말로, 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구나를 확인하곤 한다.


이번 학기 참 고맙게도 마음을 잔뜩 안겨준 학생이 있었다. 이 수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긴 편지로 적어 주었다. 그 학생 덕에 이번 학기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학기 말에 다시 받은 편지 속 한 마디가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바로, 몇 년 후에 다시 또 나의 수업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었다.



나는 시간강사다.


강사법은 3년간의 고용을 보장한다. 올해로 이 학교에서의 강의가 2년 차이니, 내년까진 여기서 강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후년은 알 수 없다. 학교가 날 원하지 않는다면 보따리를 싸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

약속할 수 없었다. 나의 미래가 불확실하여서.


그뿐만은 아니다. 시간강사로 일하는 연구자 중 다수는 '교수'라는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서류를 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종종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나 나는 딱 한 학기 단위로 내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이번 학기에 서류가 모두 떨어진다면 2학기엔 이곳에서 그대로 강의를 하겠지.

그렇다면 내년은? 하반기의 내가 운이 좋다면 24년도 1학기에는 다른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을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또 모두 떨어진다면...... 의 무한반복.

만약에 만약을 덧붙이며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아 미래를 떠올릴 수 없다.

그래서 그 학생에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먼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정규직이 되고 싶으니까.



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학생들을 만난다.

우스갯소리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대학원에 갈 때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갖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제법 즐거워 호기심을 갖고 학생들을 관찰한다.

이름과 학과는 물론 관심사는 무엇인지 어떤 생각을 주로 하는지, 한 명 한 명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각각이 가진 이야기가 마음속에 들어오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더 가르쳐주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딱 그때쯤 한 학기가 끝난다.

아쉬운 만남이 매 학기 반복된다.


그래서 난 염원한다.

조금 더 긴 호흡으로 학생들을 생각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다음 학기에도 내 수업을 듣고 싶단 말이 혼란스럽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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