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것이 가족이라고 해도

by 달빛처럼

'어쩔 수가 없다'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살아오면서 참 많이 쓰고 들었던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고, 어쩔 수 없이 결혼하고 산다.

어쩔 수 없이 이혼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산다.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수' 중에서 이도저도 안 되는 '어쩔 수'는 셀 수도 없는 수다.



작년부터 엄마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져 어딜 나가기도 무섭고, 밖에서 음식을 먹기도 힘들다고 했다. 위, 대장 내시경을 찍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배는 계속 아프다고 했다. 엄마가 호소하는 불치병(?!) 증상을 가만히 듣다가 아무래도 엄마는 스트레스가 원인인 과민성대장 같았다. 평생 직장을 다니시다 2025년부터 쉬게 되었고, 아빠 일로 인해서 많은 신경을 쓴 시기였다.


-엄마, 병원에서도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원인이 스트레스인 것 같은데?? 엄마는 내과를 갈게 아니라 신경정신과를 가봐야 할 것 같아.


일부러 '정신과'에 힘주어 말했다. 엄마는 내 말에 동의하는 듯했지만, 어느 날 다시 전화와선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TV에 명의로 소개된 의사가 있는 서울 모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KTX를 타고 3시간 걸리는 곳이지만 거길 갔다 와야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데, 죽은 귀신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러시라고 했다.


일산에 사는 동생이 하루 종일 엄마의 병원 동행을 했다. 이쪽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이미 많이 했기 때문에 정작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한 장만 찍었단다. 그러면서 약 처방해 주고 앞으로는 집 근처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약을 받으시라고 했다고. 엄마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는 병명을 명의님에게 듣고 왔다.


대학을 나오고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엄마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을 때, 항상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공신력이 없어서겠지. 꼭 많은 돈을 들여서 똑같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니 말이 맞았네'라며 싱긋 웃었다. 이번도 마찬가지. 누가 봐도 엄마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본인만 몰랐을 뿐. 주변에 있는 아줌마들이 다들 가봤다는 그 병원에 그 명의한테 가고 싶었던 것이었겠지. 엄마는 이번에도 '니 말이 맞았네'라고 했고, 나는 '큰 이상이 없음 다행이다'라고만 했다.


얼마 후, 엄마는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머리 MRI를 찍고 싶은데, 어느 병원이 나을지 물어보는 전화를 걸어왔다.

-수술까지 생각하면 A병원으로 가고 싶은데, 예약이 될까?

엄마는 이미 수술까지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 병원은 3차 병원이기에 진료소견서가 있어야만 하는 곳이다. 그렇게 엄마에게 설명을 하고, 그다음 차선으로 B 병원을 가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추천했다.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병원이며, 병원이 크지만 3차 병원이 아니라서 바로 접수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진료소견서에 막혀 결국 B 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무 이상이 없으니 다행이네

나는 그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자신을 '아픈 사람'으로 세팅을 시켜놓고 계속 그곳에 몸 상태를 맞춰가는 것 같다. 아픈 곳이 나올 때까지 병원을 전전할 것인지. 퇴직 후 집중할 곳을 못 찾아 몸에 온통 신경을 쏟아가며 사는 것 같아 안쓰럽다. 다른 취미를 해보시라고 이것저것 추천도 드려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몸 좀 나으면'이다.

엄마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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