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코로나 19와 참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연일 코로나 관련 소식들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70년도 넘는 과거에 쓰인 장편소설 페스트를 접하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읽게 된 이 책에서 놀랍게도 "우리"를 보았습니다. 정말인지, 1940년 대 작은 항만 도시 오랑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페스트 이야기에서 "우리 시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평등한 페스트, 불평등한 인간 세계
소설 페스트는 알제리의 북부 도시인 오랑에서 많은 시민들이 페스트를 겪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립니다. 주목할 점은 오랑이라는 도시가 전혀 특별한 도시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도시로 그려지고 있기에 페스트 역시 무척이나 일반적인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 소설에서 페스트는 어디에도 있고, 누구에게나 있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부터, 고위 관료자까지 오랑시에서 페스트에 예외 대상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페스트는 이렇듯 모두에게 공평하고 평등한 처벌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 세계에서 같은 종류의 고통이 모두에게 같은 크기만큼 다가오는 법은 없습니다. 오랑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페스트로 인한 감염자들이 날로 늘어나자 도시 출입 자체를 폐쇄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오랑시는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날이 지날수록 식량을 배급받는 일도 어려워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 쳐해 진 시민들은 답답함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감염자가 많다는 이유로 오랑시와 주변 도시들은 구별 지어진 것이고, 이것이 곧바로 불평등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오랑시 내부, 즉 도시 안에서도 새로운 구별 짓기는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도시 내부에 갖춰진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시민들은 더 큰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죄수들은 불가피하게 이어갈 수밖에 없는 단체생활 속에서 더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소설 후반, 도시 내의 감염자들이 현격하게 줄어 평화로운 나날들이 그려지는 상황 속에서도 몇몇 환자들은 페스트와의 사투에서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쁨에 환호하는 가운데 빈사의 고통과 환희의 중간 지점에서 이렇듯 막연한 기다림, 이렇듯 말없이 지새우는 밤이란 그들에게 더욱더 잔인한 것 같았다. (페스트 中)
어쩌면 이전과 달리 이 큰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남은 환자들은 더 극심한 우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미 치유받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이 어쩌면 이들을 더 병들게 했는지도 모르죠.
인간에게는 구별 짓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뛰어난 능력은 공평하게만 보였던 페스트를 사람마다, 그리고 처해진 환경마다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코로나 19는 어떤가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국내 각지, 나아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처벌처럼 보이는 코로나 19 역시, 그 안에는 아주 치열한 구별 짓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서양 국가들은 동양권을 싸잡아 혐오하고 있으며, 동양권 안에서도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적나라게 표출하고 있고, 심지어 한 국가 울타리 내에서도 "대구 및 경상권"을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실효적이냐를 따지고 싶은 게 아닙니다. 어떤 게 코로나 19 확산을 더디게 할 방법인지를 논하고 싶은 것 역시 아닙니다. 그러나 단 하나,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19가 아니더라도 이 사회는 나와 상대, 우리와 타자를 구별 짓기 위한 수만 가지의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베르 카뮈는 우리에게 아주 뼈아픈 질문들을 남겨줍니다.
"당신은 다수(majotiry)에 속합니까? 배척할 대상은 소수(minority)입니까?"
"당신은 계속해, 다수일 자신이 있습니까?"
"소수인 당신은, 또 다른 소수에 대해선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투쟁의 방식에 선과 악이 존재할까요?
페스트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사투하는 의사 리유, 이를 돕는 지식인 타루, 불법적인 행동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기자 랑베르, 모든 건 신의 의지라고 말하는 파눌로 신부, 페스트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코타르 등 페스트를 대하는 이들의 자세는 모두 제각기 달랐습니다.
단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들, 페스트에는 무관심한 자들, 오히려 페스트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고 이 역병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자들. 언뜻 보기에는 아주 분명한 선과 악의 대립구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작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페스트를 나치의 점령으로, 이에 대비해 페스트와 사투하는 사람들을 레지스탕스로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선(善)의 인물로 그려지는 의사 리유의 묘사를 곰곰이 뜯어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유일한 방법이란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것뿐이었다. 이 진실은 훌륭하지도 않았고, 단지 논리적 귀결일 뿐이었다. (페스트 中)
카뮈는 자신의 몸도 간수하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피로 속에서도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리유 역시 뛰어난 "영웅"으로 표현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기적인 태도로 불법적인 행동을 하면서까지 도시를 벗어나려고 하는 기자 랑베르를 의사 리유는 진심으로 응원해주었습니다.
실존주의 대표 철학자였던 카뮈는 이렇게,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조차 섣부른 규정을 원치 않았습니다. 즉, 카뮈는 일평생 Dogma(독단적인 신조)를 해체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했던 인물인 만큼 페스트를 대하는 각기 다른 방식들을 존중해주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비현실적이며 너무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얕은 관념에서 기인하는 성급한 영웅화, 반대로 성급한 낙인은 코로나 19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 진정을 위한 연예인을 포함한 공인들의 기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를 넘은 마녀사냥들도 종종 관찰되곤 합니다. 아직 공적 기부를 하지 않은 연예인, 적은 액수를 기부한 연예인들이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죠.
“악(惡)은 언제나 무지에서 나온다… 가장 구제불능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상상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를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함이다.” (페스트 中)
추상적 관념에 따른 일원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카뮈는 코로나 19를 겪고 있는 우리의 성급한 판단들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페스트이건, 코로나이건 투쟁과 좌절 이따금의 회복과 다시 이어지는 방황의 연속은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시간이 지속되면 심지어 사건들이 따분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조차 잊어갑니다. 페스트의 공포감이 극에 달할 때,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중략)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건 정말 지긋지긋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는 것은 한층 더 골치 아픈 일이죠. (페스트 中)
위 글에서 볼 수 있듯 페스트는 페스트를 겪고 있는 당사자뿐 아니라 페스트를 피해 가고 싶은 사람에게까지도, 즉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해수욕하는 겁니다 (중략) 어쨌거나 페스트만 겪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바보 같아요. 물론 사람이란 희생자들을 위해 투쟁해야죠. 하지만 더 이상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뭐하러 하는 겁니까? (페스트 中)
의사 리유와 타루는 해수욕을 통해 잠깐의 일탈을 즐기기도 합니다. 페스트를 예방하려, 페스트를 치료하려 매몰되는 현상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기도 하죠.
가장 코로나 19를 겪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코로나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입니다. 일상을 위협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증상과 결과를 과소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럴 당위도 없고, 그걸 입증할 자신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카뮈의 페스트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와도 같은 코로나의 공포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사물들, 거기서 비롯하는 행복감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공포와 무력감의 심연에 빠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보시길 원하는 분이라면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먼저 접해보시길 권장합니다. 페스트는 이방인에 비해 개인보다는 조직과 공동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하고 책의 분량이나 표현방식 등에서 이해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먼저 읽어보신다면 조금 더 편안한 일독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