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김해박물관에서 수로왕릉까지
앞으로 석탑 답사기는 매주 금요일마다 하나씩 올려보려 한다. 오늘은 잠시 방향을 바꿔, 작년 10월에 다녀왔던 김해 답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가야’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야는 교과서 속에서 짧게 언급되지만, 결코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니다.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세운 서기 42년부터 562년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약 520년 동안 지속된 강력한 연맹체 국가였다.
그래서 가야를 단순히 책으로만 읽고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역사를 직접 느껴보고 싶어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김해로 정하게 되었다. 수원에서 차로 4시간 30분을 달려 김해에 도착했다. 김해 가야 답사 첫 번째 목적지는 국립김해박물관이다.
1.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여행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려 사진이 다 어둡게 나와 아쉽다.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 신석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이 예전에는 바로 이 신석기인들이 살아가던 터전이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국립김해박물관은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지는 전시를 통해, 김해 지역의 신석기시대 삶에서부터 고대 가야 연맹의 형성과 쇠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해로 역사 답사를 온다면, 다른 유적지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방문해 보면 좋을 곳이다.
박물관을 관람하며 좋았던 점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전시관의 흐름을 따라 토기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사용에 중점을 둔 둔탁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서부터,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고 형태가 다양해진 가야시대의 토기에 이르기까지 토기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오리모양토기는 이번 관람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유물이었는데, 단순한 생활용기를 넘어 당시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과 신앙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었다. 고대인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거나, 봄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오리 모양의 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함께 매장하여, 매장자가 길을 잃지 않고 하늘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한다.
여러 개의 철 조각을 가죽으로 이어 만든 비늘갑옷이다. 본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목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깃이지만, 지금의 사람들 눈에는 단지 멋을 위한 장식처럼 보인다.
가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 ‘철’이다. 철은 가야 문명의 근원이자, 세계와 교류하게 한 소통의 매개체였다.
풍부한 철 생산을 기반으로 가야는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하며 국가의 힘을 키워나갔다. 또한 제작된 철은 일본 열도와 중국 등지로 수출되어, 가야가 동아시아 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철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가야가 세계와 연결되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이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금관가야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주변 세력과의 경쟁 속에서 점차 힘을 잃어, 결국 6세기 중반,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며 500여 년의 긴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석기인들의 배로 시작했던 전시는, 세계로 철을 수출하던 가야인들의 배를 본떠 만든 배 모양 토기로 마무리된다. 배로 시작해 배로 끝나는 전시 — 수렵의 도구였던 배가 세계로 향하는 교역의 배로 바뀌기까지, 하나로 길게 이어진 완성된 작품을 본 듯해 이번 박물관 전시가 무척 인상 깊었다.
2. 구지봉
1시간여의 박물관 관람을 마친 나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구지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지봉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걸어서 약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동네의 작은 뒷동산 같았지만, 이곳이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태어난 장소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왠지 모를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구지봉에 오르자 ‘대가락국태조왕 탄강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완만한 구릉 위의 평평한 땅을 바라보며, 문득 김수로왕이 아홉 간을 뒤에 세우고 말 위에서 이 가야 땅을 내려다보았을 장면이 떠올랐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아홉 간(九干)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때 하늘의 목소리가 “왕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땅을 파고 노래를 부르라”라고 전하자, 아홉 간은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고, 참고로 이때 불린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구지가(龜旨歌)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가 끝나자 하늘에서 자줏빛의 줄이 내려와 붉은 보자기로 싸인 상자를 떨어뜨렸고, 아홉 간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 알들은 12시간 만에 알에서 부화하였는데, 그중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온 이를 수로(首露)라 부르며 그가 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내려오는 길에 여섯 개의 알 모형을 발견했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서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장 큰 알이 가장 먼저 태어난 큰 형 수로왕을 나타낸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구지봉 답사를 마치며, 책을 통해서만 접했던 가야의 탄생 설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번 답사는 설화 속 실제 장소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3. 수로왕비릉
올라왔던 길 반대로 구지봉을 내려가다 보면 수로왕비릉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약 5분쯤 걸어가니,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봉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묘였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로, 김수로왕과 결혼해 10명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와 김수로왕의 결혼은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로왕비릉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아래로 걸어 내려가니, ‘파사각(婆娑閣)’이라 적힌 누각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답사를 준비하며 가장 보고 싶었던 장소였다.
허황옥이 고향 아유타국을 떠날 때, 아버지가 먼 항해길에 오르는 딸의 안전을 염려하며 신령한 돌 ‘파사석(婆娑石)’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허황옥은 그 돌을 배에 싣고 거센 파도를 건너 가야로 향했고, 파사석 덕분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사랑 덕분이었는지 무사히 긴 항해를 마치고 가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사석탑>
지금은 돌무더기 형태로 남아 있는 이 파사석은, 원래는 석탑의 형태였으나 옛날 선원들이 항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돌을 하나씩 떼어 가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 파사석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종류의 돌로 밝혀졌다. 전설로만 여겨졌던 이야기가 과학적 사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 깊었다.
허황옥이 실제로 인도에서 왔는지, 혹은 중국을 거쳐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가야가 이미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던 열린 문명국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파사석탑 앞에 서니, 바다를 건너와 처음으로 김해 땅에 발을 내딛던 허황옥 왕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4.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비릉 답사를 마친 뒤, 차를 타고 대성동 고분군으로 향했다. 대성동 고분군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차로 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근처에 다다르자 완만한 언덕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성동 고분군 유적지를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공동묘지’ 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이 당시 풍수지리상 최적의 위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곳에서는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총 9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총 304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고인돌, 독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입지가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는 왕묘와 지배계층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신분이 낮은 평민들의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다.
고분군 아래쪽에는 실제 발굴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한 야외 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최초의 왕묘로 추정되는 29호 목곽묘와, 이를 파괴하고 그 위에 조성된 39호 목곽묘가 발굴 당시 모습으로 복원, 전시되어 있었다.
29호와 39호는 각각 3세기말 5세기 초에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서로 다른 무덤이 한 장소에 중복되어 만들어진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사 사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덕분에 각 시기의 무덤 구조와 그 시대의 유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중복 축조 현상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북방계 주민이 김해로 이주하면서 기존의 분묘를 파괴하고 새로운 무덤을 조성했다는 설과, 묘지 공간의 부족으로 인한 불가피한 중복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야외 전시관을 나와 천천히 언덕 위로 올랐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분군 일대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비록 이곳이 옛날 공동묘지 위였지만, 스산하거나 으스스한 느낌보다는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게 오히려 평온하게 느껴졌다.
언덕에서 내려와 대성동 고분박물관으로 향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시대별로 달라지는 무덤의 형태를 구분하는 일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무덤 양식의 변화와 당시의 장례 문화를 재현해 놓아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성동 고분군 답사를 통해, 무덤은 단순히 죽은 이를 묻는 장소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기록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5. 수로왕릉
다음 날 아침, 김해 답사의 마지막 여정인 수로왕릉으로 향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가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이번 답사를 마치게 되었다.
왕릉이어서인지 왕비릉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은 199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조성 이후 수로왕릉은 금관가야의 멸망, 몽골의 침략, 왕릉에 대한 관리 소홀 등의 문제로 황폐화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선조 이후 왕릉에 대한 지속적인 수리와 정비가 이루어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왕릉에서는 조선시대의 느낌이 물씬 낫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납릉정문, 홍살문, 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 문무인석, 마양호석, 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었다.
왕릉 앞 납릉정문의 화반 위에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2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왕릉 왼쪽 편에 위치해 있는 중건신도비의 이수에는 태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모두가 수로왕비의 나라인 인도 아유타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파사석탑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 주는 유적들을 직접 보니,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가야의 이야기가 내게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번 답사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비가 내리는 김해의 풍경 속에서 시작된 이번 답사는, 책으로만 배우던 가야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책에서 배운 문장들이, 유적의 흔적 앞에서 비로소 현실 속 한 장면이 되었다. 김해를 떠나며, 역사 공부란 결국 이렇게 ‘현장을 직접 걷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렇게 김해 가야 답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