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려 석탑은 조금 달라 보일까

통일신라 이후, 석탑의 변화

by 제이미

통일신라 시대에 석탑의 기본 형태가 하나의 기준으로 정리되자, 그 이후의 시대는 이 완성된 틀 위에서 각자의 길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고려 시대의 석탑을 보면, 한쪽에서는 통일신라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은 모습이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더한 모습도 함께 나타난다.


그래서 고려 석탑은 흔히 '전통 계승'과 '변화'라는 두 흐름이 나란히 공존하는 시기로 설명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조형 감각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중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올린 안정적인 구성, 절제된 옥개석,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의 마감까지, 전체적인 인상은 통일신라 석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기의 석탑은 말 그대로 ‘익숙한 모습’이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석탑의 모습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고려시대 석탑인 천안 천흥사지 오층석탑

기단은 점점 단순해지고, 기둥 표현이나 세부 요소들은 생략되며, 전체 비례도 통일신라 시대처럼 엄격하게 맞추기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구성이 허용된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시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를 단순히 정형이 무너진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려 시대는 석탑이 가장 적극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각다층석탑의 등장이다.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이 안정적인 비례를 중시했다면, 고려의 다각다층석탑은 팔각이나 십각 평면 위에 여러 층을 쌓아 올리며 높이와 장식성을 강조한다.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아홉 층으로 치켜 올라간 이 탑은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강한 수직 상승감을 지니고 있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 정점에 있는 탑이 바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이 탑은 중국 원나라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아, 탑 전체에 불상과 보살, 다양한 장식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가늘고 높은 비례와 풍부한 장식은 고려 석탑이 국제적 조형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려 시대의 석탑은 통일신라의 기준을 해체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형식과 표현을 확장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급격히 줄어든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사찰 건립이 크게 감소하면서, 석탑 역시 이전처럼 활발하게 세워지지 않게 된다.


조선 시대의 석탑들은 대체로 고려나 통일신라의 양식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무르며, 새로운 조형 실험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출처:국가유산청)

대신 고승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이 주요 석조 구조물로 자리 잡으며, 석탑은 사찰 건축의 중심에서 점차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발전의 시기라기보다는, 이전 전통이 제한적으로 유지된 ‘보존의 시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통일신라에서 확립된 석탑의 기본 형식은 이후 시대를 거치며 그대로 유지되기도 하고, 때로는 흔들리며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고려는 그 틀을 해체하고 실험하며 석탑의 표현 영역을 넓힌 시대였고, 조선은 그 흐름을 멈추고 이전의 전통을 조용히 이어 간 시대였다.


같은 ‘석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시대에 따라 담긴 고민과 선택은 분명히 달랐다.


이처럼 석탑은 단순히 오래된 돌 구조물이 아니라, 각 시대가 남긴 아름다움(美)과 가치관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탑은 질서를 중시했고, 어떤 탑은 변화를 시도했으며, 또 어떤 탑은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 차이를 알고 나면, 석탑은 더 이상 모두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석탑의 구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한다.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라는 기본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답사에서 마주하는 석탑들이 훨씬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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