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8주차 계류 유산 기록

유산 진단부터 수술까지

by 그럭저럭

병원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 한편에 세워진 차 뒷유리에 붙은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신생아 이동 중.’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그 문장이 그날따라 가슴에 박혀,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기가 있었는데,

이제 내 손에는 아기 수첩 대신 유산 수술 진료의뢰서 한 장만이 들려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임신 7주 차, 135bpm으로 정상 범위의 아기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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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소리를 들으면 유산 확률이 많이 낮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혹시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 지금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불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나는 원래 모든 상황을 대비해두는 쪽이지만, 그때만큼은 남편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부모님들께도 일찍 임신 소식을 전했다.

나는 안정기가 지나고 알리고 싶었지만, 남편은 기쁜 일은 나누는 게 맞다고 했다.

만약 유산이 되더라도 부모님께 그대로 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많이 기뻐했다.

시어머니는 목소리만으로도 벅찬 기쁨을 숨기지 못하셨고,

친정어머니는 내 몸을 걱정하시면서 덤덤한 척 하셨지만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우리 모두는 이미 ‘복복이’가 가져올 행복한 미래에 들떠 있었다.


5주차부터 시작된 입덧은 7주차에 더 심해졌다.

약을 먹어도 후각에 예민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건 계속됐다.

공복을 견디지 못해 자주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남편은 그때 출장 중이었고, 임신 소식도 입덧도 나는 대부분을 전화로 전했다.


그리고 8주차,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함께 병원에 갔다.

남편과 처음으로 함께 초음파를 보는데, 아기는 더 자라 있었고,

처음으로 팔다리가 뿅뿅 돋아난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귀여워하고 감탄하고 있던 순간,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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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뛰지 않네요.”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지난주에는 분명히 들렸던 심장 소리가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 부근에서 보여야 할 혈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몸에서는 여전히 아기에게 피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기의 심장은 멎어 있었다.

남편도 그 자리에서 함께 그 말을 들었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산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 염색체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가능한 빨리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는 출혈 위험이 있어 난임병원이 아닌 다른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진행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진료의뢰서를 받아 나왔다.

그날 바로 집 근처 산부인과에 가서 다음날 수술을 예약했다.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단지 이틀 전에 이상한 악몽을 꾸었고, 그 다음날도 이상한 꿈을 꿨다.

그리고 심장이 멎었다는 확인을 받은 날, 남편도 꿈을 꿨다고 했다.

평소에는 꿈을 거의 꾸지 않고 기억도 못하는 사람이

그날은 우리가 다시 시험관을 하고 있는 꿈을 꿨다고 했다.


유산 소식을 들은 날, 잘 울지 않는 남편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다음날 수술을 위해 남편은 휴가를 쓰고 내 옆에 있었다.


병원에서 안내받은 수술 및 입원 안내서에 적힌 준비물도 챙겨 갔다.

수건, 세면도구 등.

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보니 당일 퇴원이라 그것들은 필요 없었다.

이 날 다시 초음파를 봤지만 심장은 여전히 뛰지 않았다.

수술은 분만실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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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만실 안쪽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바깥 대기 공간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부 휴게실에서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는데,

간호사가 나를 ‘산모님’이라고 부르다가 ‘환자분’이라고 정정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수액을 맞은 자리가 계속 아파서 말을 했지만 괜찮다고 해서 한 시간 넘게 참다가 다시 말했고,

그제야 자리를 옮겼다.

옮기고 나니 통증이 바로 사라졌다.

그 전까지는 수액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 느꼈다. 불편한 건 참지 말고 바로 말하는 게 낫다는 걸.


대기하는 동안 나는 분만실 회복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며 누워 있었고,

다른 산모들의 출산 소식과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잔인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분만실 밖,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던 남편의 몫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네 시간 동안 그곳에 홀로 앉아,

갓 태어난 손주를 보러 온 가족들의 환희와 “순산했습니다”라며

기뻐하는 다른 남편들의 통화를 지켜봐야 했다.

나중에 남편은 장모님께 유산 소식을 전하며 목이 메었다고 털어놓았다.

밖에서는 누구보다 무뚝뚝하고 강해 보이던 사람이 내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눈물은,

우리가 겪은 상실의 무게를 비로소 실감 나게 했다.


수술대에 올라갔을 때,

팔과 다리를 벌린 채 묶인 상태로 잠시 기다려야 했다.

그 짧은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간호사들은 안내를 하다가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 상태로 누워 있었다.

실험실의 개구리가 된 듯한 굴욕감이 들었다.

잠시 후 원장님이 도착한 후 마취가 들어갔고, 깨어났을 때는 수술이 끝나 있었다.

30분 정도 더 대기한 후 남편을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응급 수술까지 발생해 남편은 거의 4시간을 기다리며

분만실에서 나오는 신생아들을 지켜봐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나를, 나는 남편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안쓰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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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병원이 아닌 일반 산부인과에서 유산 수술을 하는 것이 참 잔인하게 느껴졌다.

배 부른 산모들과 신생아를 데리고 가는 가족들이 계속 눈에 들어와 마음이 괴로웠다.


유산 소식을 알게 된 날부터 나는 계속 울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TV를 보다가도 눈물이 났다.

휴지통에는 내가 쓴 휴지가 계속 쌓였다.

남편은 그걸 보며 내가 혼자서도 계속 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유산의 원인은 끝내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양수 검사를 통해 염색체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주변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

수술 이틀 후 병원에 갔을 때, 눈이 붉어진 채 진료실에서 나오는 부부를 보며 우리가 떠올랐다.


회사에는 유산 사실을 알렸고, 유산 휴가 10일을 사용했다.

법적으로 임신 주수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후 근무시간 미달 알림이 와서, 출근하게 된다면 다시 정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일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유산 휴가를 마치고 다시 복귀해야 하는 현실과 꼬여버린 근무 시간 계산처럼, 일상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힘든 일을 오래 곱씹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이 없이도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 역시 많이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녘 문득 깨어날 때면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을 꼭 껴안으면, 그의 온기를 통해 씁쓸한 기분이 조금씩 옅어졌다.

우리는 완벽한 부모가 되기 이전에, 서로에게 더 단단한 편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불쌍하다며 거의 일주일 동안 많이 우셨다.

친정어머니는 담담하게 괜찮다고 위로하시며

미역국을 꼭 챙겨 먹고 찬물에 손을 담그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양가 부모님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남편은 다음에 만약 또 임신을 하게 된다면

안정기까지는 알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태명은 복복이었다.

남편이 머리를 복복 긁어주며 장난스럽게 애정을 표현하던 습관에서 나온 이름이었고,

복도 많이 가져오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그 행동을 하면 그냥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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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가 세운 계획은 때로 무력하게 무너진다.

하지만 함께 겪어낸 슬픔은 관계의 틈을 메우는 단단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찬바람 불던 창밖의 계절은 그 사이 어느덧 따뜻해졌고,

벚꽃과 개나리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풍경이 오히려 더 사무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편은 이제야 내가 조금 밝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완전히 괜찮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아기가 머물다 간 그 짧고도 강렬한 시간 덕분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는,

불편한 대기실에서 홀로 견디며 나를 기다려준 그 마음 같은 것이라는 걸.


상처가 아문 자리에 돋아난 새살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하다.

당신의 계절에도 예기치 못한 겨울이 찾아왔다면,

그저 버티고 있는 당신 자신에게 가만히 손을 얹어보길 바란다.

우리가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그날을 지나온 작은 온기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아픔을 겪었지만,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남편과 함께라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