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에 오랜 친구를 만났다. 한참을 얘기하던 중 평소 그 답지 않은 심각한 얼굴로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는 정말 강아지를 못 키울 것 같아.”
얼마 전에 강아지가 죽은 후,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혹시 내가 먼저 죽는다는 확신만 든다면 다시 키워봐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순간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느꼈다고도 했다.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어느 철학자의 말을 들은 후였다. 그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은 내가 소중하게 챙겨줘야 한다.’는 말을 했다. 마음을 그렇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그 순간의 고통은 물론 그 순간이 오기 전의 두려움도 그 후의 허망함도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 철학자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냥 받고만 싶어 하는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철학자의 사람 사랑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 마음만 챙기고 있었다.
그 친구의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었다. 대개는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들이었다. 조건도 없고 이유도 없이 자기를 좋아해 주는 모습이 마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도 했고, IQ 말고는 모든 게 사람보다 낫다는 말도 했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로선 그저 듣기만 했지만, 그의 행복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가끔, 그 친구의 ‘이젠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울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 대가(代價) 없는 일은 없는 건가?’
슬프고 두려운 일들이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일들과 행복한 시간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 슬프고 두려운 일들을 대한다는 건 너무 고통스럽다. 또 그 고통은 즐거운 기억들에 비해 너무 무겁고 질기다.
며칠 전, 그 친구에게서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그 아픔을 이겨냈다는 걸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밝기만 한 목소리가 아니라, 밝음과 어둠이 섞여있었고 담담함도 느껴졌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예전의 강아지와 함께 지나간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별 감흥이 없는 일상이나 미래의 고통보다는 지금의 행복이나 즐거움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도 했고, 이제 곧 은퇴를 하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지나간 일에 대한 추억도 소중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추억 때문에 아파하기보다는 좋았던 기억으로 지금의 삶을 잘 꾸며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지금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하는 그 친구의 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를 위해서 양보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이 현재가 오히려 우리에겐 가장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 많이 지금을 양보해 왔던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렸다.
학교를 선택해서 다녔고 졸업을 했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서 3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소중하지 않았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즐겁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보살피지 못한 건 물론이고, 가족의 마음도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저 비교하는 게 일상이었고 당장의 고통이나 슬픔이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피하려고만 했던 것 같았다.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볼 생각을 못 했다. 내 주변 여기저기에 그런 행복의 요소들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나무 사이로 난 오붓한 길을 걸으며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산에서 봤던 다람쥐, 토끼, 새들이 주는 평화로움도 있었고, 눈 쌓인 나뭇가지를 보는 기쁨도 있었다. 가족들과의 여행이나 스포츠 경기장에 갔던 시간들도 있었고, 해마다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얻을 수 있었던 뿌듯함도 있었다. 그리고 회사가 아니었으면 쉽게 가지 못했을 낯선 곳의 여행도 있었다는 걸 새삼 알았다. 또 1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자고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읽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그냥 하는 것들이나 해야 되는 것들’로 여기기만 했다. 그 순간들을 즐기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다. 추억이란 게 있을 리 없으니 기억도 빠르게 희미해져 가기만 했던 것 같다.
별 감흥 없다고 여겼던 일상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기쁨과 행복은 물론 슬픔과 두려움과 아쉬움과 불안까지도 모두 함께 할 일상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하나하나 붙들어 매어 엮어놓고 싶다.
그래도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감만 있었으면 좋겠다.
막상 두려움이나 불안과 마주친다면 여전히 힘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