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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May 21. 2015

전명진의 꿈같은 소리 #_1

                         어느 소년의 이야기


“꿈이 뭔가요? 그거 먹는 건가요?”

선후배나 친구와 둘러 앉아 술잔을 앞에 두고 이런 농담  주고받은 기억,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꿈, 그거 먹는 것 맞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는 꿈을 먹고 삽니다.

아래 이 친구처럼 말이죠.

여러분께 자기만의 생각으로 삶을 이끌어간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그 친구는 꿈을 먹고 자랐거든요.


그는 어릴 때 미술공부를 했습니다. 제법 잘했죠.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아주 큰 상도 몇 번 받았습니다. 아. 그러면 누가 봐도 견적 나오겠죠. 미대를 가면 되겠구나. 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 덕에 산업디자인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러다 아주 우연하게 미국을 갑니다. 왜냐고요? 누구나 중학교 때 기억을 되살려보면 거기에 보이스카웃, 걸스카웃이나 아람단 등이 있을 겁니다. 그가 다니던 학교에는 우주소년단이라는게 있었죠. 물론 지금도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상용 통신.방송위성으로 무궁화 위성이 있었습니다. 그게 의미가 있었던지라 전국의 우주소년단에서 몇 명을 뽑아 발사장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소년은 운이 좋게도 그 일원이 되었고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나사(NASA), 미 항공 우주국에 가게 됩니다. 충격적인 일이죠. 중학생이 나사에 간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입구부터 달랐습니다. 사이즈별로 우주복을 입어볼 수 있고, 달에서 가져왔다는 암석이 진열되어있고, 창 밖에는 바로 그 무궁화 위성이 든 델타로켓에 서 있었지요. 그날, 그 소년은 결심합니다. 이제부터는 우주선을 만들어야겠다. 그림 그거 해봐야 소용없다고 말이죠. 그길로 한국에 돌아와 예체능을 준비하던 그는 이공계를 지망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그게 얼마나 허망한 꿈인지 말이죠.

뭐 운이 좋았던지 어쨌는지 그는 고2 중간고사에서 수학 19점을 받기도 했지만 미친듯이 노력한 끝에 결국 서울 시내의 어느 대학 기계공학과에 진학합니다.

그러나 이게 왠 걸. 그는 나사에 대한 꿈을 입학과 동시에 포기합니다. ‘이런.. 나름 물리, 수학 좀 한다 생각했는데 여긴 잘하는 애들 천지네.’따위의 생각 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합시다. 그런데 더 잘 하는 그 친구들의 꿈은 국내 유수의 대기업 입사였습니다. 그는 소위 말하는 88만 원 세대의 선봉에 선 세대였거든요. 2002년에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우주선과 같은 큰 꿈은 접어버리고, 이제는 무얼 하고 살 지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잘못하면 기계공학과를 나와 기계 부품으로 살다 끝나게 생겼다는 위기의식을 미리부터 느끼게 됩니다.

멀쩡히 잘 하던 그림도 관뒀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기계공학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그는 긴 긴 고민을 시작합니다. 쉴새없이 책도 읽어보고 -책에 길이 있다고들 했으니까요- 수 많은 사람들과 소주 잔을 기울여도 봅니다. (차라리 술잔에 답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그러나 답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군대에 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ROTC로 지원해서 졸업과 동시에 장교 복무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 군대에 끌려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계획을 세워 졸업여행을 갑니다. 말에 졸업여행이지 그저  스물서넛의 남자 넷이서 인도라는 나라를 모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돈도 없었고 새로운 모험에 대한 동경이 클 때니까요.

처음 발을 내디딘 인도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은 뉴델리 공항이 몹시 좋아졌습니다만, 그 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1970년대 영화에 나오는 시골 터미널 느낌이었죠. 고양이 만한 쥐가 돌아다니고 그랬으니까요. 맙소사. 공항에서 내린 서울 촌놈 넷은 공황에 빠집니다. 여행은 무슨. 한 달 동안 이 나라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며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하던 애들입니다. 처음 며칠은 정말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개와 사람, 그리고 소가 뒹구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죠. 사기꾼이나 소매치기는 말 할 것도 없으니까요.

다행히 젊은 남자 넷은 금방 적응을 했고,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자미마스지드라는 인도 최대의 이슬람 사원에 가보기로 합니다. 뭐 걸어서 가보자 했죠. 규모가 크니 저 멀리서 보아도 보이거든요. 그러다 정문을 찾지 못하고 사원의 옆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 길을 잘못 들었네요. 뭔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느낀 그들은 다시 되돌아 나가기도 그렇고, 입구는 저 앞이라 그냥 가보기로 합니다. 그 골목은 거적이나 다름없는 천막으로 지붕을 두른 집들이 줄지어선 구역이었습니다. 구성원도 조금 달랐죠. 팔이나 다리 하나 없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 반쪽이 없는채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충격에 빠졌죠. 특히 그 젊은이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곳은 바로 불가촉천민촌이었던 거죠. 달리트라 불리는 이들은 너무 천해서 닿아서도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마을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요. 심지어 평민이 길가다가 그들의 그림자가 닿으면 집에 가서 그 부분을 씻고 나올 정도라고 하네요. 그런 사회적인 것을 떠나 그냥 보기에도 몹시 불행한 그들의 삶이 안타까웠던 그 청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만약에 내가 저런 불구나 가난한 사람이라면 과연 저런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였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인상과는 달리 마을 사람들의 생활상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마을을 무사히 빠져나온 서울 촌놈은 이후 여러 날 동안 고민에 빠집니다. 우리 한국이 더 잘 살고 저렇게 불행한 사람도 없는데, 왜 그들의 표정은 자연스럽고, 우리의 표정은 무거운가. 소위 회색의 도시와 푸릇푸릇한 그들의 도시가 비교되기 시작합니다. 아그라, 자이푸르, 뭄바이, 고아 어느 도시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인도가 더 큰데, 그들의 표정은 별다른 격차가 없고, 우리는 늘 우울해 보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삶을 받아들이며 사는데, 우리는 매일이 불평입니다. 환경에 대해, 자신에 대해 늘 아쉬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자연스러울 리 없습니다.


그는 대학 4년 동안 해오던 걱정을 증폭시켰습니다. ‘뭐야. 이런 나라가 있다니. 이런 무질서와 혼돈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도대체 왜 더 사람 사는 것 같은 냄새를 풍기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던 자연스럽게 사는 법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부품으로 살지 않고 자신으로 살게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더 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군복무를 장교로 하니 월급이 짭짤합니다. 그 돈을 모아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다른 나라의 생각이 보일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1년 동안의 세계여행을 준비합니다. 물론 틈틈이 나라도 지켰겠죠. 그리고 제대와 동시에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세계여행의 첫 나라 브라질을 향해 떠납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그 젊은이는 바로 저의 이야기입니다.

공감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없는 것이 남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소개랍시고 첫 글부터 자기 얘기로 채우다니요. 그렇지만 술자리에서도, 어떤 수업에서도 듣기 쉽지 않은 이야기가 곧 펼쳐집니다. 물론 시청각 자료와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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