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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Jan 21. 2018

그곳은 내게 더 상상하라 했다

알버타, 대자연의 선물

지난가을, 캐나다 알버타 관광청의 초대로 로키산맥의 아름다움을 담으러 그곳에 다녀왔다.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이 갖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자연의 매력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감사하게도 관광청은 세심한 준비를 해 두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를 위해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멋진 SUV 한 대를 내주었다. 스케일이 다른 로키의 산세. 빽빽한 나무로 둘러쳐진 풍경 사이에 잘 정비된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여행잡지 트레비의 고서령 기자와 여름에 함께 전시를 했던 김물길 작가.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리고 사진 하는 사람, 이렇게 셋의 로드트립이었다.  

알버타의 관문 캘거리를 시작으로 백악기 공룡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7000만 년 전의 땅 배드랜드로 향했다. 누구나 아는 백악기의 스타 티라노사우르스의 완벽에 가까운 화석에서부터 트리케라톱스와 호박에 갇힌 모기까지. 큰 규모와 다양한 자료들은 누구나 신비한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남자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진짜 뼈들을 현실감 넘치게 재현해 놓은 덕에 누구에게나 흥미진진하다. 박물관 옆, 7500만 년 세월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드러난 지층을 산책하며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면 더욱 실감 날것이다.

개인적으로 와 닿은 장면이 하나 있는데, 공룡에 대해 다양한 시각체험을 해 볼 수 있는 터치스크린 패널이 있었다. 직접 눌러보고 이리저리 조작을 해 보는 장치. 아이 둘을 혼자 데려온 아버지는 옆에 앉아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어디 있는지 아들은 금세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딸은 아빠 옆에서 이것저것 만지며 논다. 흔한 상황이지만 아빠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어딜 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나는 프리랜서인 탓에 수입의 편차가 큰 대신, 시간이 조금 여유롭다. 휴일에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일에 집에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조금 덜 바쁘면 내가 집에서 아이를 보아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 까진 그러고싶다. 한 손에 젖병, 한 손에 태블릿 펜을 쥔 모습을 상상해본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총각의 로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추억 말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내게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덕분에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것들을 만들어 보았다. 엔지니어인 아버지 덕에 뚝딱뚝딱 함께 뭔가를 만들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겨울이면 썰매를, 88올림픽 때는 굴렁쇠를 만들었다. 머리가 크면서 데면데면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늘 의욕 넘치는 어머니도 좋지만 한 템포 느리면서 무던한 아버지의 성향도 내게 전해진 걸 느낀다.    

물감을 풀어놓은 것 마냥 맑은 날씨에 한껏 들떠 있던 우리는 이틀 째 되는 날 산불 소식을 들었다. 바로 옆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큰 산불이 나서 원래 예정되었던 마을 하나를 갈 수 없게 되었단다. 어휴. 불길이 얼마나 세기에 도시 접근조차 안되나 싶었다. 갔으면 큰 일 날 뻔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루이스 호수. 너무나 유명한 유키 구라모토의 명곡 'Lake Louise'의 탄생지. 1984년 당시 그는 음악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힘든 시간이었고, 처절한 그의 작곡 과정을 지켜본 제작자가 붙여준 이름이었다고 한다. 86년 발매 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를 구원해 준 곡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이 곳만 세 번을 방문했다. 호숫가에 앉아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기도 했고,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의 근사한 티 타임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연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큰 산불이라고는 경험해 본 적 없었기에 그 영향이 이리도 막대한 줄 몰랐다. 그저 흐린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역 전체가 산불 연기에 뒤덮인 것.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으리라 기대했던 우리는 눈 앞에 그물망을 들이댄듯한 시야에 실망이 커졌다. 누구보다도 내가 다급해졌다. 글과 그림은 현장의 모습을 자신의 심상으로 가공해 보여주는 반면 사진은 그때 아니면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답답했다. 열심히 취재하고 인터뷰를 담는 고 기자, 레이크 루이스의 물을 떠다가 그림을 그리는 김 작가와는 달리 초조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풍경으로 안되면 동물이라도 찾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야생동물이 제법 출몰한다는 길을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훑고 다녔다. 그나마 사슴 몇 마리를 보았지만 기대했던 곰이나 엘크는 볼 수 없었다.

걱정이 됐다. 그저 놀러 온 것이 아니라 관광청과 잡지사에 사진을 넘겨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쓸 사진이 없다. 사진을 시작한 지 이제 곧 10년 차, 어떤 상황에도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건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가까운 대상을 담아야 한다.' 단지 흐린 날이라면 멋진 구름과 어울리는 장관을 담기도 하겠지만 그마저도 안 되는 뿌연 대기를 극복하려면 그 방법뿐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에 와서 카페며 길거리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인물사진을 좋아하는 내게 마침 좋은 대상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아름다운 풍경은 연기에 가리어져 있고 사람은 선명하니 나름 흔치 않은 장면이 되었다. 거기서 출발해 생각을 짜 내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호수로 나갔다. 밴프 국립공원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미네완카(Minewanka) 호수. 인디언 원주민들의 말로 죽은 영혼이 이곳에서 만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분위기를 한 번 담아보고 싶었다. 전날 달빛이 밝은 것을 보아 두었다. 보름의 경우 떠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그 어스름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마침 달은 곧 자러 갈 준비를 하는지 이만큼 내려와 있었다. 물길 작가에게 붓을 들렸고 달과 숲, 아래에 호수까지 담아냈다. 그녀도 보통의 센스가 아닌 덕에 나의 의도를 읽고는 물을 묻혀와 붓 끝을 휘게 했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 한 장. 만족스러웠다. 그 사람이 가진 정체성과 분위기, 아름다운 자연이 한 장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영상이 소설이라면 사진은 바로 시와 같다. 비록 멋진 자연을 많이 담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더 고민할 수 있었고, 더 상상하다 보니 심상이 함축된 장면 하나를 건졌다.  

동물을 많이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물길 작가는 그곳의 동물 인형을 샀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도로의 사진에 곰과 엘크, 산양을 그려 넣었다. 흥미로운 협업이었다. 대 자연이 안겨주는 안정감과 선진국 특유의 여유가 좋았던 캐나다. 그 덕에 우리는 더 상상하고 더 즐거울 수 있었다.


트레비 12월호 기사 http://v.media.daum.net/v/2017122109425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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