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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Jun 25. 2015

전명진의 꿈같은 소리 #5

술 참 좋아하는데요


고백하건대, 저요, 술 참 좋아합니다. 술자리에만 있어도 즐겁죠. 주종에 관계없이 함께하는 사람이 좋다면 늘 좋습니다.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술자리는 즐기는 사람, 오로지 술만 좋아하는 사람, 술자리도 술도 안 좋아하는 사람 누구와도 잘 마십니다.

학교 다닐때 창조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요즘의 창조경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계공학과 선배들이 만든 모임입니다. 2000년대 초반, 88만원 세대의 선봉에 선 저희는 과도기적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윗 세대의 선배들이 수월하게 취업하는 것도 보았고,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게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정말 많이도 놀았습니다. 학교 분위기상 공부를 열심히하는 다수가 있었으나 저와는 가깝지 않았습니다.

100명 정원에 2~5명 남짓한 여학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남자인 과에서 놀아봐야 뻔합니다. 당구장에 가고 게임방이나 가는게 다죠. 저녁에는 당연하게 술을 먹고요. 보통은 소주를 마셨습니다. 어쩌다 맥주를 먹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둑한 술집에 앉아 담배를 피워가며 소주를 마셨죠. 돈이 없을 땐 학교에서 탕수육 하나에 예닐곱명이 소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실내에서도 담배를 피울수 없고, 교내에서도 음주가 안되니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저도 집에 오면 머리며 손이며 온 몸에서 담배냄새가 났죠.  


그 덕에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생겼습니다. 술먹다 사라진 친구를 찾아 온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구요. (보통 그러면 알아서 집에 잘 가 있는게 태반이죠) 때로 다치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죠. 정말 술이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다양한 술과 함께 많은 일들을 겪었죠. 심지어 신도에게는 음주가 금지된 이슬람국가에도 술을 찾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은 신도가 아니므로 구할 수만 있다면 마셔도 됩니다.

창조라는 모임이 어느덧 15년이 되어갑니다. 그 사이 다들 건실한 나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많이들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의 아버지도 있지요. 다들 바빠서 일 년이면 몇 번 모이기도 힘들게 되었지만 여전히 술잔을 주고 받으며 추억을 곱씹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한 선배가 말했습니다.

“거참. 술은 지금도 먹을 수 있는건데 말이야.”

다들 무슨 소리냐며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렇잖아. 지금도 먹고 앞으로도 마실건데 그 땐 왜 그리 기를 쓰고 마셨나 몰라.”

그때도 충분히 놀았지만 굳이 술을 그리 많이 마셔가며 놀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듣고보니 그렇더군요. 오늘 마실 술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실컷 마셔대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아주 양반이 되어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 그 열정으로 더 많은 것을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죠. 술도 마시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 모험했을테니까요.


물론 어떠한 상황에서도 술을 미루지 않은 덕에 자존과 신념을 지킨 사례도 있지요. 소설 <고요한 돈 강>으로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미하일 숄로호프의 <인간의 운명>에 보면 주인공 소콜로프가 술 덕에 목숨을 부지한 일화가 나옵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으로 징집된 운전병 소콜로프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포로가 됩니다. 이후 독일 전역을 끌려다니는 포로생활을 하죠. 그러던 어느날 극도의 굶주림과 과중한 노역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이유로 소장에게 문책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술과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은 자신들의 방에서 권총을 들고 장난치듯 총살을 치르려했죠.


그 상황에서 소장은 독일군의 승리를 위해 술 한 잔과 안주를 먹고 죽을 것을 명합니다. 평범한 가장이던 소콜로프는 적군의 승리를 위해 마시라는 한 마디에 단호하게 거절하죠. 그렇다면 스스로의 죽음을 위해 마시라며 소장이 끝까지 술을 권하자 오랜 시간 굶주려 있었음에도 그는 술만을 마십니다. ‘환대에 감사하며 죽을 준비가 되었으니 총살을 거행하시라.’는 말에 의아한 소장은 죽기 전에 안주도 먹으라 하지만, 소콜로프는 ‘나는 첫 잔을 비운 후엔 안주를 먹지 않습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대목은 당시 안주를 넉넉히 사먹을 돈이 없던 제가 대학생 때 자주 써먹던 내용입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거푸 독한 술을 세 잔이나 먹으면서 안주는 단 한 입만 베어먹었던 소콜로프의 의연한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죽음 앞에서 스스로 돼지가 되지 않고 러시아인으로서, 군인으로서의 품위와 신념을 지킨 덕에 그는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거장 미하일 숄로호프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술과 사색을 곁들이면서 천천히 알게 되었죠. 그 어떤 삶의 장애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해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 이제 우리 여행을 간다고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누구나 마음에 담아둔 여행지가 적어도 한 두 군데씩은 있으실겁니다. 신비로 가득한 저 멀리 페루도 좋구요, 역사와 문화의 이탈리아도 좋고, 대자연의 아프리카 어느 나라도 좋습니다. 한 번 정해보세요.


그러면 다음으로는 무얼 할까요? 항공권 예매? 숙소 예약? 맛집 검색?

아닙니다.

그 전에 우리가 지나는 몇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여행이 얼마나 가기 어려운지, 왜 이번에 내가 여행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를 만들어 놓고 혹시라도 가지 못했을 때에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그 다음으로 항공편 등을 알아보면서 다시 또 못가는 이유를 찾습니다.

떠나는 용기가 다른 핑계에 휘둘리도록 그냥 둡니다. 그럼에도 떠난다면 나는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이니까요.


때로 더 긴 여행을 준비하고 꿈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 달 동안의 세계여행, 장기간에 걸친 대륙횡단. 누구나 꿈꾸는 멋진 일이죠.

그런데 그 전에 우리는 학교를 졸업해야하고, 취업을 해야하고, 돈을 모아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장대한 계획은 차일피일 밀리게 되는거죠.


이것은 비단 여행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싶은 일과 하고있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늘 하고싶은 일에 대한 열망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 때 마신 술은 지금도 마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실 수 있죠. 매번 내일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반납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가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앞의 과정을 마쳐야만 다음 과정으로 가는 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했다고 생각합니다. 술 한 잔에 안주 한 점 이듯,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균형이 더 즐겁고 오래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요.

즉, 우리의 삶은 결코 코스요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자신의 삶 만큼은 9첩, 12첩 반상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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