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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Oct 13. 2017

D-17. 3년

알아두면 쓸데없는 우리 커플의 소소한 역사와 특징들

0.

오늘은 남자친구와 사귄지 3년이 되는 날이다.

어제 내가 신혼집에 가서 자는 바람에 자정부터 남친이 출근하기 전까지는 같이 있었지만, 어제 새벽 6시에 잠드는 바람에 출근할 때 제대로 배웅도 못해 줬다.

그리고 오늘 저녁도 남친은 야근하고, 나는 상담을 하며 딱히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사실 남친은 오늘이 3주년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카톡으로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그냥 서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만 주고받았다.


매우 일상적으로 지나간 3주년이다.

만난지 1000일도 지나고서야 알았으니, 우리 커플은 기념일을 챙기는 데 딱히 소질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다담주에는 결혼을 하고, 그러면 결혼기념일이 생길테니 이렇게 사귀는 날짜를 챙기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다.


뭐, 3년이 별건가 싶지만 그래도 기념일이니 글로 혼자 기념해본다.

몇 개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우리 커플의 소소한 역사와 특징을 정리해본다.


1.

우리는 미팅을 통해 만났다.

나는 직장 동료들과, 남친은 대학교 동창들과 나왔다.

장소는 강남에 있는 미팅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방마다 딱봐도 미팅하고 있는 남녀들이 들어차 있던.


3:3 미팅이었는데, 이 미팅에서 나를 제외한 여자 둘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 해프닝이 있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다음주에 미팅 멤버가 그대로 다시 만났다.


이 6명 중 3명(나와 남친, 그리고 또다른 남자분)이 수원에 살고 있었고, 우리끼리 그 사이에 한 번 더 만났다.


미팅일로부터 사귀기까지 약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2.

남자친구는 놀이터에서 고백했다.

내가 옆구리를 쿡 찔러줬다.

대신 철벽을 하나 쳤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고. 도망치려면 지금 도망가라고.


남친은 이 철벽을 가볍게 넘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걸리는 놀이터에서 남친차를 타고 집까지 시속 10킬로로 갔다.

아쉬워서 한 바퀴인가 두 바퀴인가 더 돌았다.


3.

사귄 후 2주인가, 한달 동안 정말 매일 만났다.

어떤 날은 내가 회사에서 야근하고, 택시를 타고 남친 집까지 간 뒤, 남친이 자기 차로 나를 우리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남친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차로 20분이었다.

그 20분을 보겠다고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그렇게 했다.


4.

연애할 때의 주 데이트 장소는 남친의 원룸이었다.

우리 둘다 게으른 성격이라 그냥 집에 늘어져서 낮잠을 자거나,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봤다.

종종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5.

사귀면서 딱히 헤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많이 싸우지도 않았다.

주로 내가 뭔가에 섭섭해하고, 남친이 그걸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패턴이 많이 반복되었다.


남친이 나랑 사귀면서 제일 빡쳤을 때는 내가 남친한테 '미안해'라는 말을 악착같이 들으려고 집착했을 때라고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때의 상황이 잘 기억이 안난다.


6.

남친은 작년 3월 내 생일에 깜짝 청혼을 했다.

자기가 살던 원룸을 깨끗하게 치우고(이게 가장 대단한 일이다) 장미꽃으로 하트를 만든 뒤 반지를 줬다.

자기가 해야 할 말은 편지로 써서 줬다.

나는 울면서 yes를 했던 것 같다.


그때의 청혼은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언젠가 하면 너랑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7.

우리는 매일 밤마다 전화를 한다.

전화는 주로 내가 한다.

남친은 거의 항상 게임을 하고 있다.


남친은 멀티태스킹에 탁월하다.

딱히 물어보지 않으면 게임을 하면서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다.


문제는 탁탁거리는 키보드 소리였다.

이 소리는 그가 전화에 100%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이 때문에 나는 자주 섭섭해하거나 화를 냈고,

결국 남친은 키감이나 다른 여타 성능은 떨어지지만 키보드 치는 소리가 안나는 키보드를 구매했다.


우리는 여전히 전화를 잘 하고 있고, 그는 게임을 잘 하고 있다.


8.

우리는 전화를 끊을 때 '사랑해'라고 말한다.

대부분 내가 먼저 말하고, 남친은 수줍게 피식 웃은 뒤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 수줍은 피식을 사랑한다.


9.

우리는 공통의 친구가 거의 없다.

미팅 때 같이 나왔던 남자 두 분 정도랄까.

남친은 자신의 친구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길 좋아하고, 나는 그의 친구를 만나는 걸 싫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0.

나는 때로 남친한테 '못생겼다'는 말을 한다.

남친도 나한테 '못생겼다'를 시전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나한테 못생겼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종종 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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