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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l 31. 2017

D-90. 소설을 쓰는 작가의 내면

김영하, <말하다>

1.

김영하 작가는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고, 이 산문도 그냥 유명세 때문에 눈여겨보고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작가가 1998년부터 2014년까지 했던 강연, 좌담,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했던 '말'들을 정리한 것이다.

같은 사람이 했던 말이기 때문에 중복이 꽤 있기도 했지만,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주제들이 다뤄지기도 했고, 반복되는 내용도 어떤 결로 다루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닿기도 했다.


2.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은 수필이나 르포 등 사실에 기반한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소설 쓰기에 대해 논한다. 소설을 안 써봐서 정말 이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 수필과는 정말 다르다는 건 알겠다.


그는 소설 작가가 인물을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움직일 무대를 열어줄 수 있는 '문지기'라고 표현한다.


저는 작가로서 전지전능하지는 않아요, 그들을 컨트롤할 수도 없고요. 그 인물들은 스스로 움직이는데, 저는 단지 그 움직임이 시작되도록 스위치를 올리는 셈이에요. 그런데 그걸 저만 할 수 있어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일종의 문지기예요. 연극이 펼쳐질 극장의 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예요. (...) 제가 전지전능한 신이고 인물들이 제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는 얼른 가서 문을 열어줘야 되는 거죠.
- 91페이지
저는 작가가 극장의 문지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극장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그 열쇠로 극장 문을 열면, 배우들이 들어가 연기를 하는 거예요. 전 지시를 내리지만 배우들이 제 말을 듣지 않기도 해요. 극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저는 떠나요. 제가 가면 그다음에 관객들이 표를 끊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겪는 환상하고, 독자들이 겪는 환상은 좀 달라요. (...) 여러분들은 똑같은 소설을 보면서도 각기 다양한 꿈들을 꾸게 될 거고, 다양한 기억으로 그 소설을 갖게 되는 거예요.
- 144페이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듣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써나가는 동안 작가 자신이 해체됩니다. 해체되지 안고 새로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작가의 말 따위는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딴전을 피워댑니다. (...) 소설의 말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작가의 통제력은 0에 수렴합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이제는 인물들이 말하고 작가가 듣는다는 것을.
- 173-174페이지


소설이나 드라마 등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작중인물은 분명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저도 OO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요'와 같이 작가의 손을 떠나서 제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 인물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극장의 문지기라는 비유가 참 절묘하다.


3.

저는 거기서 기본적 희열이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해방감. (...) 저는 가끔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책상 서랍에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을 써라. 부모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글. 반대로 말하자면, 부모한테도 보여주고 싶고 선생님한테도 보여주고 싶은 글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 136페이지


오늘은 글쓰기가 참 힘든 날이다. 소재가 정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재 고갈 자체를 소재로 삼아 징징거리는 글을 쓰려다가, '작가의 서랍'에 고이 잠자고 있던 이 글을 꾸역꾸역 써본다.

오늘의 글이 나한테 해방감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쓰는 어떤 글들은 분명 해방감을 준다.

그리고 해방감이 클수록 부모님께 보여주기 싫은 글이기도 하다.


4.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140페이지


매일 글을 쓰지만 내가 작가라는 인식은 없다. 굳이 책을 내야만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책을 낸 사람이 모두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무튼 나는 아직 작가가 아니다. 나는 야심은 커녕, 내가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내 글이 남들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지 의심스럽다.

그래도 나는 쓴다. 일단 시작한 거니까 100일간 써볼 생각이다. 지치고, 지쳐 쓸 게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써볼 작정이다.


5.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 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 160페이지


어쩌다가 내 독서 위시 리스트에 들어오게 된 천명관의 <고래>를 무척 재밌게 읽었다. 작가의 적극적 개입이 들어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실제로 우리 할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옛날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뭔가 조금 슬프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중심인물이 2명 내지 3명이 있고, 그들의 일생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오간다.

하지만 막상 다 읽고 나니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지 뚜렷히 알지도 못하겠고, 이 이야기를 소재로 글도 못 쓰겠다.

그런데 이 문장이 뭔가 위로가 된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한다는 것. 뭔가 기대된다.


6.

독자는, 고맙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저와 다르다는 거죠. 제 인생의 구경꾼인 거에요. 잠깐 보고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도 있어요.
제가 장편을 쓰고도 발표하지 않은 것은, 발표해서 독자들의 반응을 얻는 게 작가로서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보여준다는 데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 작가에게 전작보다 못한 작품이라는 건 없어요. 이해 못할지 모르지만 자기 인생의 스토리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쓴 소설들은 제 인생의 각 단계별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 165-166페이지


정말 솔직한 표현이다. 독자는 그저 구경꾼이라니!

동시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열심히 글을 쓰고 페이스북에도 공유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지만 굳이 내 글에 깊숙이 들어오는 걸 원치는 않는다.

애초부터 글감이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글은 모두 내 인생의 스토리이다.

몇몇 글은 어떤 생각의 전환을 담고 있기도 하다.


7.

저를 포함한 문학 작품의 독자들은 '예상치 못한 찬란한 실패'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존재들입니다. (...)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바로 그것을 내놓으라'는 게 문학 독자의 욕망인 것처럼 보입니다.  
- 168-169페이지

문학 작품을 그리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특정 장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나 역시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


8.

과연 첫사랑 같은 책이란 뭘까? 저는 생각합니다. 한때 읽고 사랑했으나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모든 책이 바로 첫사랑 같은 책들이라고.
- 178페이지


한때 읽고 사랑했으나 (앞으로는 다시 읽을 것 같지 않더라도) 차마 버릴 수 없는 책들.

그런 책들로 가득찬 책장을 가지고 싶다.


*이 책의 모든 인용구는 <말하다>(김영하, 문학동네)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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