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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l 31. 2017

D-91. 여섯 사람

결혼 준비 중 가장 속상한 날

1.

얼마 전 <두 사람>이라는 글에서 '결혼의 본질은 두 사람에 있다'고 썼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두 사람이 사랑해서, 함께 하고 싶어서 하는 게 결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결혼을 '전통을 따르는 통과의례'로 보았을 때,

결혼은 두 사람이 아니라 여섯 사람이 하는 것이다.

여섯 사람의 생각이 모두 맞아야 무탈하게 결혼을 치룰 수 있다.


2.

여느 예비 부부처럼, 우리 역시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 많은 걸 생략하고 싶었다.


생략의 핵심은 예단과 예물이다.

정확한 의미나 기원은 모르지만, 예단은 신부집이 신랑집에, 예물은 신랑집이 신부에게 주는 것이 보통이다.(예물은 신부집이 신랑에게 보내기도 한다.)

아마 이 주고받음 과정에는 자신의 자녀를 잘 부탁한다- 그리고 귀한 자녀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물질로 표현해야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마음은 크고 작음이 희미하지만, 물질은 크고 작음이 분명하다.


3.

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예물 시계를 서로 주고받지 않기로 했다.

나는 커플링도 잘 안낄 정도로 악세사리를 귀찮아하고,

남자친구도 현재 가지고 있는 시계에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 집에서 남자친구에게 예복을 해주었고,

나는 예복과 예물 가방을 받기로 했다.


4.

예단은 보내기로 했다.

처음 예단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신랑 부모님만 뭔가를 받는 게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한국 남자(그리고 남자의 부모님)는 집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경우 남자친구가 전세자금의 80%가 넘는 금액을 부담했다.

마음은 반반씩 부담하고 싶었지만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고, 우리 부모님은 남자쪽에서 집을 해와야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나는 예단을 보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단이 집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신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여겼다.


5.

그런데 우리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예단에 대응하는 것은 '함'이라는 예식을 통해 갖춘 예물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예물 가방과 예복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종종 내가 반지(또는 이에 해당하는 보석류)를 못 받는 것을 서운해하셨다.

서운해하시고 말거라고 생각했다.

서운함을 내비치실 때마다 난 필요없다고 계속 주장했으니까.

내가 받는 것이니 내가 필요없다고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물은 그냥 '내'가 받는 게 아니라 '우리 집을 대표한 내'가 받는 거였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1) 뭔가를 받더라도 '함'이라는 예식을 통해 받는 것이 중요하다

2) 예복, 예물 가방 외에도 뭔가 보석류에 해당하는 것을 받고 싶다

는 우리 부모님의 의중이었다.


6.

시댁에서도 생각을 아예 안하신 게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의견을 전달할 때 "(신부집에서) 안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필요 없으시대요"라고 얘기했던 게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었다.


7.

결국 오늘밤이 되어서야 우리 부모님은 그동안의 '넌지시'태도를 전환해 '확실히' 함을 받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함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이 원하시는 보석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가 뭘 받을지는 모르겠다.

이왕 할거면 확실히 부모님이 서운하지 않으시도록 받고 싶은 금액대를 물어보자는 남자친구의 의견에 따라 내가 부모님께 여쭤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것은 시댁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두리뭉실한 의견이었다.

받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내 입으로 얼마짜리 마음을 받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는 뜻인 것 같다.  


8.

이럴 거면 차라리 그놈의 다이아몬드랑 예물 시계를 할 걸 그랬다.

어차피 부모님들 돈 나가는 건데 내가 괜한 것을 걱정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대접받으면서 결혼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을 꼭 물질로 치환해서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9.

결혼을 준비하면서 가장 속상한 날이다.


패배감

씁쓸함

그리고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혼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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