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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l 26. 2017

D-95. 아직도 나는

김녹두, <감정의 성장>

1.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재밌게 봤다.

몇 년 전인지는 기억도 안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언젠가부터 어떤 영화를 언제 봤는지, 어떤 노래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 확인하는 건 슬픈 일이 되어버렸다.


영화는 사람을 움직이는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냈다. 

인간에게는 5가지 주요 감정이 있으며,

어떤 게 핵심 감정이냐에 따라 성품에도 영향을 준다.

살면서 겪는 어떤 일은 핵심 기억이 되며, 이 핵심 기억은 핵심 감정에 영향을 준다.


2.

정신과 전문의이자 동화작가인 김녹두의 <감정의 성장>은 감정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핵심감정은 늘 마음이라는 바다를 채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외적 사건이나 갈등으로 인해 느끼는 슬픔이나 두려움, 분노, 기쁨 등의 감정도 핵심감정의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파도입니다. 같은 사건, 같은 경험에 대해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반응과 강도가 다른 것은 그것이 각자의 핵심감정의 바다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별일 아닌 사건을 다른 사람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큰일로 경험합니다.
- 74페이지


핵심감정은 기쁨, 분노, 슬픔 등 한 단어로 정의될 수는 없는 것 같다.

예시로 나온 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그녀의 핵심 감정은 어렸을 때 반복적으로 엄마에게 거부된 감정이었다.


이동식 선생(핵심 감정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핵심감정은 첫 기억과 반복되는 꿈속에 드러나 있다. 일거수일투족 속에 핵심감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 77페이지


내 첫 기억이 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반복되는 꿈은 안다.

나는 시험 보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 

그것도 공부를 제대로 못한 상태로,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시험.

조금씩 인물이나 환경은 변해도 이 시험 보는 꿈을 계속 변주해서 꾼다.


또 고등학교 때 꿈도 종종 꾼다.

어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한, 하지만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꿈에 나왔다.

꿈에서였지만 참 반가웠다.


3.

난 고등학교 때 공부를 참 잘했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잘했는데,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의 나는 매우 다르다.

중학교 때의 나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의 나는 외톨이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분명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고등학교 때의 인연이 몇 명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같은 반이 아니었거나, 이상하게 같은 반일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한때 나는 내가 진짜 외톨이인지 아닌지보다, 

남들에게 외톨이로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쪽팔리니까. 


고1 때 나는 한동안 남들이 보기에나 내가 보기에나 외톨이였다.

고1 초반의 끔찍했던 한두 달이 지나고 나서는 어제 꿈에 나온 친구와 친해져서 좀 나아졌다.

그녀는 나를 많은 외톨이 상황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친구였던 걸까.


그 친구와의 추억이 많지는 않다.

대부분 같이 밥을 먹고 쉬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등 일상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나는 말이 많았고(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친구가 얘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구는 즐겁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또, 내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을 읽고 와서 '건강한 이기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데(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이 페이스로 잘 사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친구가 갑자기 화를 내며 "제발 이기적으로 살지는 말아!!!"라고 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지금까지 생각나는 걸 보면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친구에게 묻고 싶다. 

너에게 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기억되느냐고.


4.

내가 고등학교 때 외톨이가 된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학교라는 공간에서 누군가 외톨이가 되는 데에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일차적으로 난 초반에 좀 재수 없는 애였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나는 전교 1등으로 1학년 1반에 배정되었다.

이 사실에 호감을 가진 애들도, 비호감을 가진 애들도 있었는데 나는 호감을 가졌던 애들한테 무관심한 태도로 대응하는 만행을 저질러버림으로써 초기 관계 형성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버린다.


그 당시의 나는 가고 싶었던 외고에서 떨어진 뒤

'세상은 넓고 공부 잘하는 인간은 많구나'

'고등학교는 공부하는 곳'

등의 공부제일주의 사고를 가졌던 인간이었다.

 

그전까지는 친구란 가만히 있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같은 중학교에서 진학한 아이들이 10명도 안 되는 낯선 여고에서의 생활은 

관계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참히 일깨워주었다.


5.

재밌는 것은 그렇게 공부에 집착했으면서도 처음 봤던 중간고사에서 전교 12등이라는, 나에게는 수치스러운 등수를 했다는 것이다.

국어 시험지 채점을 하면서 틀린 문제가 너무 많아서 '답이 잘못된 거 아니냐'는 헛소리를 엄마한테 하던 내가 기억난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해서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그렇지만 나의 핵심감정에 참 근접한 이야기를 한다.

"왕따를 당하더라도 전교 1등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6.

무엇이 나를 이렇게 성취주의적인 인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우리 부모님은 나의 성취를 좋아하시긴 하셨지만, 

성취를 못한다고 뭔가 벌을 주거나 애정을 안 주거나 했던 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난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지도 모르겠다.

정말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성취, 그중에서도 상대적인 성취(남들보다 잘나고 싶다)를 좋아하는 나에게 학교의 입시 시스템은 최적의 환경을 선물해주었다. 

너무나 명확하게 누가 더 뛰어난지를 수치로 알려주었으니까.


어른이 되면서 평가 척도는 희미해졌다.

대학 때는 등수가 사라졌고, 

직장에 와서는 더 이상 점수를 받지 않는다. (등급 비슷한 걸 받기는 했던 것 같지만, 워낙 강조도 안 하고 보상에도 큰 차이가 없는 회사들을 다녔던지라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고등학교 때 시험 보는 꿈을 꾼다.

공부도 하나도 안 하고, 시험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어쩌면 이런 상황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공포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시험을 볼 필요가 없는 아직까지도 말이다.


7.

스스로의 감정, 생각, 행동을 관찰하는 힘을 정신 치료에서는 '관찰적 자아'라고 합니다.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자신을 '경험적 자아'라고 한다면 이런 자신을 마치 무대 위의 배우를 바라보듯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신이 바로 '관찰적 자아'입니다. 이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기와의 대화는 이 경험적 자아와 관철적 자아 사이의 대화입니다.
- 121페이지


오늘같이 습도도 낮고 쨍쨍한 여름날,

선풍기 바람 옆에서 내 방에 앉아 이렇게 솔직한 자기와의 대화를 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온다.


오늘의 관찰적 자아는 여기서 종료하는 걸로.


*이 글 속 모든 인용구는 <감정의 성장>(김녹두, 위고)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끝>




글/ 김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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