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추억, 아빠의 마음

폴 토머스 앤더슨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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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폴 토머스 앤더슨(PTA)의 최고 걸작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의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거의 확신한다. 162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길지 않다. 의외 지점에서 유머가 돌출하고, 심지어 PTA 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운 요소(자동차 추격전, 어렴풋한 해피 엔딩, 그리고 권선징악!)도 있다.


프렌치75라는 과격 좌파 혁명가 그룹에서 활동했으나, 동료와 아이를 가진 뒤 일선에서 물러나 은둔해 사는 밥(레오르도 디카프리오)이 주인공이다. 아내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만삭의 몸으로도 신나게 사격 훈련을 하는 사람이었고, 출산 얼마 후 혁명 활동을 이어가겠다며 집을 나간다. 이후 16년간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양육은 온전히 밥의 몫이었다. 밥은 윌라와 함께 신분을 숨긴 채 조그만 마을에 살면서 매일 '알제리 전투' 같은 옛날 영화를 보거나 대마초를 피며 살아간다. 물론 언제 자신을 뒤쫓는 정부 요원들이 나타날지 모르기에 보안에는 각별히 신경을 쓴다. 과거의 악연 록조 대령(숀 펜)이 이들 부녀를 찾아내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사는 세심하면서도 굵직하다. 위에 언급한 도입부가 지나면 밥 부녀의 은신처인 박탄 크로스에서 벌어지는 록조 대령과 밥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이곳을 벗어나면 윌라, 록조 대령, 밥, 또 다른 인물이 벌이는 황야의 추격전이 이어진다. 사실상 이게 영화 전부다. 이렇게 줄이면 간단한 이야기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꽤 장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록조 대령의 이민자 소탕 작전, 황야의 자동차 추격전 같은 굵직한 시퀀스가 매우 테크니컬하고 볼만하게 촬영됐으면서도 서사를 풍부하게 만든다.


PTA는 그간 영화에서 미국, 그리고 좀 이상한 남성을 탐구해왔다. '원 배틀'도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얼마 남지 않아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는 이상주의적 좌파와 인종주의에 기반해 주류에 침투한 극우 세력의 대결을 그린다. 밥과 록조 모두 인상적인 캐릭터다. 밥은 16년 전 가졌던 혁명의 열정을 오랜 독박 육아 속에 잃어버렸고 암구호나 집결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열정은 세상의 변혁이 아니라 딸과 자신의 안전에 맞춰져 있다. 록조는 열망하던 인종주의자 모임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가입 허락을 받기 직전이지만, 개인적인 성벽으로 인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상황이 되자 이를 어떻게든 은폐하려 한다. 이 영화 촬영 시점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작품 기획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전일 텐데, 이 영화에는 이민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조지아 현대차 공장 급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PTA가 보기에 지금 미국은 양 극단 진영 사이의 전투에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인가. 어찌 된 일인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밥이 관료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프렌치75 상담원의 전화에 "퍽킹 리버럴"이라고 욕하는 장면은 폭소를 부르고, 결국 자신은 소파에서 옛 혁명 영화를 보면서 소일하는 처지지만 딸의 저항은 응원한다는 결말은 미소를 부른다. PTA,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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