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수가없다'
**스포일러 있음
'호불호가 갈린다'는 얘길 들었고(이건 사실 혹평이 많다는 뜻), 지인과 이 작품을 봤는지 얘기하며 '왠지 끌리지 않는다. 어쩐지 예상이 된다'는 말도 스스로 했더랬다. 그래도 박찬욱 신작이라는 의무감에 봤는데, 예상보다 더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박찬욱은 사회적, 정치적 소신이 뚜렷한 감독으로 꼽히고 그것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크지 않은 사람이지만, 영화에서 이를 명확히 드러낸 적은 의외로 많지 않다. '헤어질 결심' '아가씨' '박쥐'의 탐미적 여정 속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읽기는 쉽지 않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공동경비구역 JSA'나 '복수는 나의 것' 정도? 전자는 남북분단과 냉전의 현실, 후자는 양극화된 사회의 비극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쩔수가없다'는 놀랍게도 사회적 메시지가 뚜렷하다. 극초반부 주인공 유만수(이병헌)가 동료 제지 노동자들에게 해고의 부당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말하듯이, 노동절 대형 집회에서 울려 퍼질법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메시지가 영화 내내 강력히 울린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인간 노동자라고는 관리자인 유만수 혼자 남고, 모든 것이 기계에 의해 자동 처리되는 제지 공장의 멋지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통해 드러나는 'AI 혹은 기계화 시대의 노동'에 대한 우려도 들을 수 있다. 물론 박찬욱은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기에, '어쩔수가없다'는 노동영화의 가장 창의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알려져 있다시피 해고된 유만수가 자신의 취업 경쟁자를 하나둘씩 제거하는 내용이다. 유만수는 유망한 첼리스트의 자질이 보이는 딸, 반항적인 듯하지만 속은 깊은 아들, 멋진 리트리버 2마리, 테니스와 댄스 교실을 즐기는 사랑스러운 아내, 그럴싸한 전원 주택을 가진 가장이다.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말할 만큼 안정된 삶을 살다가 실직 기간이 길어져 이 모든 것을 영원히 포기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자 유만수는 초조해지고 광기에 빠진다. 그렇다고 유만수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자의 기질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막상 살인을 하려니 스스로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은 이병헌의 감탄스러운 코믹 연기로 잘 살아난다. 물론 박찬욱은 시나리오를 모호하게 쓴 뒤 배우에게 알아서 연기해달라고 맡기는 사람은 아니다. 상대를 쏘기 전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겨누거나, 총을 두세겹의 장갑 안에 갖고 다니거나, 고시조(차승원)의 시체를 토막내려다가 차마 못해 주저하는 등의 설정으로 유만수의 성격을 드러낸다. 고시조의 시체가 깔끔하게 묶인 장면에선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역시 박찬욱의 '미감'이자 '취향'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유만수가 살인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삶에 쉽게 동화된다는 것이다. 같은 업계 사람이고 같이 실직한 처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첫 제거 대상인 구범모(이성민)의 삶을 살피다가 우연히 그가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을 상황을 목격하자 이를 저지하려 하고, 구범모와 아내 이아라(염혜란)의 대화를 엿듣다가 이들의 표현이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기도 한다.
박찬욱 전작들에 출연한 배우들이 특별출연 형식으로 다수 나오고, 유만수가 도구로 이를 뽑는다거나 하는 식의 설정이 전작을 연상케 하는 등 감독 자신의 작품을 패러디 혹은 오마주하는 느낌도 있다. 다수의 안정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린 창작자의 자신감일까. 이미리(손예진), 이아라 등 실직자의 아내들이 남편들보다 현실적이고 생활력 있고 강인해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감독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중년 남성성에 대한 탐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찬욱이 보는, 혹은 실제의 한국 중년 남성의 모습이 유만수,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박희순)의 모습에 골고루 나누어 묘사됐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힘든, 연민받을만하지만 혐오받을 만도 한, 그런 한국 중년 남성의 모습을 극장에서 관찰하고 싶은 관객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